거대한 굴곡이 장악한 명동예술극장의 드넓은 무대. 극은 아득한 언덕을 다급하게 넘어오는 이들로 시작된다.

언덕은 삶을 버티려는 갖은 몸부림들을 포용하는 공간. 또한 결국 그 몸부림들이 좌절되었을 때 넘어야 하는 고비. 극의 시작을 주도한 이들은 언덕을 넘어오며 ‘지옥을 지나왔다’고 말한다. 까마득한 저편, 언덕 너머는 이들에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을 넘어온 이들은 스스로를 ‘버려진 물건’이라 칭했다. 그렇다면 지옥을 건너온 이들, 언덕 이후의 삶은 지옥과 유리된 시공간일까?

스스로 ‘捨てられた物(버려진 물건)’이라 부르는 이들은, 위안소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명숙과 미즈코다. 두 사람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위안소를 벗어나 떠돌다가 만주에 다다랐다. 일제가 주도한 폭력의 객체로 여겨지던 이들이 극 초반부터 꺼낸 이야기는, 일본 아이들을 중국인에게 팔아넘기던 자신들의 행위. 이들은 스스로 버려진 물건이라 말하지만, 주변에 산재돼 있는 생명들을 또 다시 버리는 주체가 됐음을 관객들에게 실토한다.

버림과 버려짐의 뒤범벅,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배반의 관계를 형성하는 두 사실이 병치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모순’이라 부른다. 1945년 만주의 조선인 전재민 구제소는 모순의 시공간이었다. 제국에 시달린 식민지에 해방의 시공간이 당도했을 때, 식민지는 제국적인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극은 일본인을 박해하고 중국인을 깔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을 반복해 보여준다. 이들은 일본인에게 폭력을 당연하게 행사할 수 있고,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채 선입견만으로 만주인을 혐오한다. 폭력에 희생되었던 식민지의 국민들은 이제 폭력을 행사한다. 버림과 버려짐이 혼재됐다.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해방)가 도래했음에도 나락은 여전했다. 모순은 일상이었다.

제국은 식민지와 철저한 ‘구분 짓기’를 시도한다. 조선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본인이 될 수 없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조선과 그 국민이 스스로 주체일 수 없게 만든다. 제국은 식민지를 타자로 상정해 ‘(제국에 의해) 지배당해야 하는 국가’, ‘문명국으로의 발전을 도와줘야 하는 국가’ 등의 옷을 덧입힌다. 제국주의 세계 내에서 식민지는 그들이 또 다른 식민지를 생산해내지 않는 한 줄곧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때, 과연 모든 일제적인 것들에서도 완벽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연극은 ‘그렇지 않다’고 명료히 말한다. 비(非)일본인으로 구분 지어졌던 이들은, 이제 1945년 해방 이후 만주 조선인 전재민 구제소라는 시공간에서 비(非)조선인을 철저히 가려낸다.

구제소에서 가족처럼 아울러 지내던 이들은 미즈코의 국적이 밝혀지자 미즈코를 적대시한다. 이들은 미즈코에게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히 얘기 했으면 (미즈코와 같이 조선행 열차 타는 일을) 생각해봤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국적을 밝혔으면 미즈코는 이들과 애초 함께 지낼 수 있었을까? 이웃들의 구분 짓기는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전염병에 걸린 수봉, 마약중독자 선녀, 위안부 출신 명숙에게까지 엄격한 구분의 잣대가 적용된다. 그럴듯해 보이는 잣대였지만, 연극은 원창과 영호의 대사와 숙이와 철이의 시선으로 그 잣대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꼬집어낸다.

11살, 9살 꼬마 숙이와 철이는 극 내내 무대가 아닌 하수에 위치한 망루에 자리한다. 아역을 맡은 성인 배우들이 성인 역할을 맡은 다른 배우들과 한 무대에 있을 때의 위화감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숙이와 철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극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화자이기도 했다. 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무대)에 개입하거나 공존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순박한 시선으로 어른들의 고되고 난폭한 서사를 그려낸다. 숙이와 철이는 일본인 친구가 하루아침에 죄인 취급 받는 사실을 의아해하고, 미즈코가 일본인인 줄 알면서도 함께 지내는 것을 금기하지 않는다. 이 어린 존재들은 잘잘못을 구분 못하는 비이성적 존재들이 아니라, 우리가 맹신하는 잘잘못의 구분이 과연 실재하는 합리적 기준에 근거한 것인가 되돌아보게 하는, 우리 인식의 균열을 유발하는 인물들이다.

독립운동을 하던 형으로 인해 가정이 파멸되는 과정을 겪으며 자란 영호는, ‘친일했다’는 죄로 사람들에게 죽도록 얻어맞던 여자를 보며 의문을 품는다. ‘진짜 힘든 시절에는 다들 찍 소리두 못허구 고개 처박구 있던’ 사람들이 이제 와 ‘독립투사라도 된 것처럼’ 친일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을 박해하느냐며 역정을 낸다. 영호의 혼란스러운 분노는, 일제 치하를 겪어낸 존재들의 삶 전반을 ‘친일’과 ‘항일’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구분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하게 한다. 또한 원창은 미즈코가 일본인임이 밝혀지자 “물론 벌 받을 놈들은 벌을 받아야겠지만, 일본사람들이 밉다구 해서 그 사람들 씨를 죄 말리자구 들 수야 없는 노릇”이라며 “우리가 타구 가는 기관차 운전수도 일본사람”이라며 ‘속상한 노릇이지만 결국은 같이 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짚어낸다.

다시 범벅, 구분의 논리에서 벗어나려는 명숙

어느 행위를, 그 행위의 주체인 사람을 하나의 명확한 잣대로 재단하는 일이 가능한가. 설사 재단이 가능하다 해도 현실에서는 완벽한 분리와 단절이 가능하지 않음을 짚어내는 것. 연극은 모순을 지적하면서, 또 다른 모순을 그려낸다.

첫 관극만으로는 풀리지 않던 지점이 있었다. 극 말미, 선녀와 명숙-미즈코의 결합이다. 위안소 포주였던 선녀와 위안소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명숙과 미즈코. 각각 버림의 주체와 객체였던 이들이, 함께 버려짐을 경험하자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또한 조선으로 돌아갈 가장 쉬운 길을 앞두고 미즈코와의 우회를 택한 명숙의 결정이 내심 의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관극에서 필자의 귀에 명확히 박힌 명숙의 한 대사.

이해해주겠다구? 이해한다구? 아니, 당신들은 절대 이해 못해. 그래, 우리는 지옥을 지나왔지. 아무런 죄도 없이 우리는 울고 웃었을 뿐이야. 어떤 지옥도 우리를 더럽히지는 못했어. 하지만 당신 앞에 있으면, 우리는 영영 더러울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대루 거야.

기다리던 열차는 다가오고, 가족처럼 지내던 피난민들은 구별의 시공간에서 낙오자를 선별해내기 시작했다. 명숙은 낙오자 선별 과정에서 패자부활의 기회를 얻었지만, 스스로 기회를 거부한다. 명숙의 과거를 허물이라 단정하는 이들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숙의 허물을 ‘이해해준다’는 일시적인 관용의 은사를 내렸다. 그러나 명숙은 ‘못할 짓을 해야 하는 세상’이자 ‘죄를 묻자면 모두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험한 시절’, 즉 뚜렷한 구분 자체가 모순이 되는 이 세계에서, 구분의 논리로 삶을 지속하는 일이 허망한 일임을 직감했다. 명숙은 모순과 뒤섞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전염병에 걸린 수봉을 중심으로 선녀와 명숙, 미즈코는 기존 대열에서 빠진다. 객체들의 연대로 보일 수 있지만, 갈림길에 있던 명숙의 의지가 더해지면서 이들은 주체로서의 연대의 형상을 명확히 드러낸다. 명숙이 선별의 세계를 수용하고 낙오를 간신히 벗어난 상태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면, 그는 계속 선택 받은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숙은 그 세계를 박차며 미즈코에게 “이 세상이 끝나기라두 했니? 재수가 없었던 것뿐야. 이번 차를 못 타면 다음 차를 타면 되고, 기차를 못 타면 걸어가면 돼. 정 뭣하면 로스케라두 하나 꼬드겨서 차를 얻어타구 가지?”라 말한다. 명숙은 스스로 과거의 굴레마저 내던진다. 시대의 희생양으로 규정되며 지독한 고독의 시공간을 보냈을 그들, 명숙과 미즈코는 선별의 세계를 스스로 거부하며 남보다 조금 더 운이 없었던 사람이 되었다. 이를 통해, 타인의 고통의 무게를 어림짐작으로 부풀린다는 것, 그들을 연민의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의 상처를 불치병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명숙과 미즈코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생(生)들의 처절한 부대낌을 의연하게 견뎌온 명숙과 미즈코, 이들은 극 말미에 하늘거리는 싱그러운 원피스를 입고 언덕 아래 벤치에 앉아 찬란한 조명을 받고 있다.

<1945>의 서사는 1945년을 살아낸 개개의 삶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연극은 역사에서 소외되거나 보잘것없이 여겨졌던 삶의 편린들이 역사를 다시 구성할 근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거대한 패러다임을 벗어나 개인의 삶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과거와 ‘지금 이곳’이 연결돼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1945>는 말한다. 모순과 유리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의 철저한 구분의식이 우리를 모순 자체로 만들고 있다고 말이다.

(사진 제공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