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연극이란 무엇일까’ 질문 해왔다. 여러 책과 강의를 기웃거리다가 직접 발 벗고 찾아 나서기로 했다. 대학로 중심을 벗어난 이화동 사거리 끝자락에서부터 서울프린지페스티벌까지를 다녀왔다. 소위 젊은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활동하는 공간이다. ‘젊음’은 나이로 경계 짓는 것이 아니라 기성의 문법에 반대한다는 상징적인 단어이다. 젊은이답게 기존의 연극과는 다른,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낯설고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다.

그냥, () 슬기로운 생활

청운예술극장에서는 극단 낯선사람의 <그냥, 슬기로운 생활>이 올랐다. 이 집단은 자칭 ‘젊은극단’으로 전통과 기성에 질문을 던지며 항상 새로운 연극 만들기를 시도한다고 한다. 작년 프린지페스티벌에 참여해 화장실이란 공간에서 <햄릿>을 공연했다는 것과 청운예술극장을 기반으로 끝자락페스티벌을 주최했다는 것 외엔 알려지지 않은 극단이다. 이번에 공연한 <그냥, 슬기로운 생활>에서는 새로운 연극을 만들기 위한 재기발랄하고 키치적인 발상이 돋보였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규칙과 규범들이 존재한다. 가시적으로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기준도 있지만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수용하는 기준들도 존재한다. 윤리가 그렇다. 선악의 구분이 확실할 때에는 윤리의 기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혼란스럽다. <그냥, 슬기로운 생활>은 현실에서 자연스레 따르고 있는 도덕적 기준에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가치들을 시도한다. 그래서 연극 무대는 현실과 명확히 분리한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낸다. 연극이 허구적일수록 새로운 시도들과 사회적으로 유효할 수 없는 새로운 가치들을 말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좁은 청운예술극장 무대는 삼면의 하얀 벽과 앞뒤가 뚫린 양문형 냉장고를 활용해 넓고 경제적으로 쓰이며, 그렇게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공연은 ‘썩어빠진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스트레인져스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파워레인져를 닮은 스트레인져스는 바로 낯선사람 자신들에 대한 은유였고, 대한민국 구하기 프로젝트는 공연에 대한 큰 포부였다. 공연의 마지막은 극장 출입구 앞으로 이동한 냉장고를 배우들이 빠져나가며 커튼콜 없이 마무리한다. 공연을 본 관객 역시 냉장고 문턱을 넘어 나갈 수 있게 했다. 90여 분 간의 판타지는 비로소 냉장고 문턱을 넘음으로써 깨지게 되는 것이다.

극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연극적 상상력을 창출하기 위한 수미상관의 구조를 취하지만 내실은 그리 튼튼하게 구성되지 못했다. 인과적인 극 구조의 흐름으로 짜이기보다는 주제에 대한 단상과 편린들로 나열되기 때문이다. 시간강사가 등장하고, <햄릿>을 다르게 보여주고, 소품으로 사용한 냉장고는 오늘날의 청년과 현실을 상징해서 보여준다. 때로는 배우가 맡은 역할에서 빠져나와 자기서사(Self-narrate)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형식을 선보인다. 공동창작 작업방식으로 만들어서인지 난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완벽히 구현해낸 환상적 무대 위에 배우 개인이 등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런 와중에도 파편화된 이야기를 연결해준 것은 소품으로 사용된 양문형 냉장고였다.

냉장고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공간과 윤리와 규범과 규칙을, 기성의 문법에 짜여진 현실세계를 상징한다. 대한민국의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냉장고에는 현대인들이 살고 있다.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자,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뉴스 앵커가 인터뷰하는 냉장고에 사는 사람들은 2014년, 2003년, 1999년, 1995년의 사람들 그러니까 세월호, 대구지하철참사, 씨랜드청소년수련원 화재사건, 삼풍백화점 사건의 시공간을 연결해주는 사람들이다. 냉장고라는 틀과 대한민국의 굵직한 사건들의 나열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변한 게 없고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체 작품에서 중심적인 이야기는 각색된 <햄릿>이다. ‘만일 클로디어스가 부도덕한 선왕을 죽인 것이라면?’ 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햄릿과 클로디어스,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뒤섞어 보자고 제안한다. 악인과 선인의 경계는 흐려지고, 햄릿과 클로디어스에 대한 다른 평가를 시도한다. 원작의 극중극은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는 영웅 풍자극으로 뒤바뀌었고, 형식은 애니메이션으로 대체되었다. <도라에몽>의 한 장면을 가져와 대한민국을 의인화시킨 실시간 더빙은 탁월한 현대적 변용이 아니었나 싶다. ‘인재를 쓰지 못해 죽어가는 대한민국’을 보여주며 죽어가는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대통령한테 전화하자는 말은 그간 국가가 한 사람의 소유에 불과했음을 풍자한다. 각색된 <햄릿>에서, 영웅풍자 내용의 극중극을 보는 클로디어스는 부정한 선왕을 죽였음에도 죄책감을 가지고 성찰하는 반면, 햄릿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고민 없이 죽임을 선택하고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쉽게 수행한다

<그냥, 슬기로운 생활>의 오필리어는 많은 부분이 각색됐지만 그만큼 납득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셰익스피어 원작 <햄릿>에서 오필리어는 “수녀원에나 가시오”라는 햄릿의 말을 들은 지 얼마 안 있어 물에 빠져 죽는다. <그냥, 슬기로운 생활>의 오필리어는 달랐다. 월경을 하지 않아서, 햄릿의 아이를 가졌을까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아버지가 알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두려워하는, 그런 오필리어가 되어 있었다. 햄릿은 여전히 복수라는 큰 목적의식을 갖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떠난다. 수녀원에나 가라는 햄릿 ‘오빠’의 말을 잊을 수 없다는 임신한 오필리어는 버려지는 것에 대한 억울하고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다. 원작에서의 오필리어와 달리 주체적인 오필리어로 바꾸려던 것일까? 두려움에 떨던 오필리어는 복수를 꿈꾸며 줄곧 검은 상복만 입어 왔고 아이를 낳고 잘 키우기 위해 수녀원 대신 사창가를 갔다. 청량리의 오필리어가 되는 과정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것은 오필리어가 남성적 시각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냥, 슬기로운 생활>은 기성세대의 윤리, 도덕에 반기를 제기하겠다고 외치지만 여성에 대한 시각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겠다는 메시지가 위선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오필리어는 말한다. 사창가의 남자들은 햄릿‘오빠’와 달랐다고. 성매매 후 고맙다고 하고, 힘들지는 않은지를 묻는 따뜻한 남자들이었다고. 그런 남성들이 뱃속의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는단다. 사창가에서 모진 시련(?)을 다 겪은 오필리어는 더 처절하게 살겠다고 고백한다. 순종적인 오필리어는 그렇게 처절한 오필리어가 된다. 윤리의 전복이라는 시도가 무색해질 만큼 허무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각색이다. 그냥, ‘여전히 그들만’ 슬기로운 생활일 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배우 이영재가 말한 피아노 건반 88개에 비유한 기성세대의 문법은 인상 깊다. 피아노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88개이지만, 인간은 제한된 건반 너머의 89번째 위와 –1번째 아래도 들을 수 있다. 말했다시피, 우리의 가능성은 만들어진 틀 안에서 갇혀버린다. 89번째와 –1번째는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과 닮아 있다. 바로 <이방연애>의 퀴어, 여성, 배우이다.

관심은, 이반과 방으로

올해의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 작품인 창작집단 3355의 <이방연애>는 이반이기도 하고 이방이기도 한 퀴어 여성의 연애에 대해 얘기한다. 형식은 다큐멘터리이다. 최근 들어 많아진 다큐멘터리 연극은 거대 서사보다는 개인의 이야기를 추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배우의 개인적인 서사들이 무대 위에서 발화되곤 하는데 때로는 이런 이야기들이 갖는 연극성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낭독공연인가?’ 의심되기도 한다. <이방연애>도 그러한 형식을 차용했다. 개인의 이야기, 아니 10대부터 40대까지의 퀴어 여성들의 사연을 여배우 한 명이 공연한다.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부르곤 하는 형식에 대한 의문은 <이방연애>에서 조금 줄어들었다. 퀴어 정체성을 가진 여러 여성의 이야기들이 발화되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퀴어’이자 ‘여성’인 ‘배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피아노 건반 88개의 바깥에, 89번째에 –1번째에 있는 사람들, 충분히 볼 수 있었지만 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정해진 틀을 바꾸거나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기보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뮤지컬 배우를 꿈꿨던 배우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곤 그저 순종적인 <햄릿>의 오필리어와 <지킬앤하이드>의 엠마, 아니면 창녀인 루시 뿐임에 좌절했다. ‘왜 내가 감정이입할만한 역할은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야기가 전부이다. <이방연애>에는 특별한 연극적 장치가 없다. 다만 공연을 하는 방에 찾아온 관객을 위해 직접 만든 차(tea)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오직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차를 나눠 마시며 중앙에 옹기종기 마련된 의자에 앉을 때는 누가 관객이고 창작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하다. 마치 남성/여성/이성애자/동성애자 등 여타의 분리들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관객을 방의 중심에 앉혀놓고, 방의 모서리를 돌아가며 발화되는 이야기는 일상의 중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소수자의 이야기를 보도록 집중시키고 수많은 퀴어 여성의 삶이 언제나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연극은 타인의 삶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특별한 연극성이 없어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이유는 바로 그런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해봐요.

따로 같이 사람들은 어떤 방에 들어가 있겠죠.

근데 저는요, 방이 아니라 문지방 같은데 누워 있는 기분이었어요. 줄곧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이반이자 이방인 퀴어 여성의 삶을 ‘문지방’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비유한다. 문지방도 하나의 공간이고, 퀴어도 한 명의 똑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타인의 삶에 대한 인식을 넓혀준 공연이지만 연극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한 명의 배우가 말하는 10대부터 40대까지의 퀴어 여성의 현실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배우 단 한 명의 연대기인지 여러 퀴어 여성의 이야기인지 헷갈린다. 발화하는 배우 역량의 문제이거나 혹은 단조로운 연출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퀴어 여성, 퀴어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과연 어떤 방법으로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객을 초대하여 자신의, 퀴어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진 제공 – 창작집단 3355, 극단 낯선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