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은 예년처럼 차가웠으나, 한국은 유난히 춥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하기엔 과언이고, 난방 기술이 현대화된 덕도 아니다. 비밀은 촛불에 있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던 시민들의 촛불 행진이 전국을 따뜻하게 데웠다. 촛불이 모이니 횃불이 되었고, 횃불이 지속되니 찬바람이 물러났다.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는 어느 정치인의 말이 턱없는 소리였음을 촛불시민이 증명해냈다.

오랜 기간 어둠에 둘러싸였던 세상은 빛을 되찾았고, 앞이 보이지 않아 방황하던 존재들은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죄지은 사람들은 캄캄한 창살 안으로 들어갔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 자체가 비정상으로 들렸던 시대에서 벗어나 ‘정상’의 참된 의미를 되찾는 듯했다.

모두가 안도할 때,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 ‘이웃’들이 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들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이 아직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들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미수습자 가족들이다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기에, 3년째 ‘세월호’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부재와 망가진 체제의 추악함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자, 전 국민에게 ‘집단적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 그렇기에 잊지 못할/잊어선 안 될 사건이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밖에 없다.

한국 연극도 이를 반영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연극은 다양한 방식으로 줄곧 세월호를 기억해왔다. 작품의 질을 따지거나, 표현 방법의 적절함을 논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세월호는 동시대 연극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화두였다.

그 중심에서 ‘혜화동 1번지’는 우직했다. 혜화동 1번지 6기 동인(구자혜, 김수정, 백석현, 송경화, 신재훈, 전윤환)은 매년 ‘세월호’를 주제로 기획초청공연을 열었다. 참사가 벌어진 이듬해부터 꾸준히 ‘세월호’를 극장에 가져왔다. 올해도 어김없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돼 세월호 공연을 다시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소망”이라던 그들의 바람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3년 차 ‘세월호’엔 극작가 고연옥, 윤미현, 한현주와 연출가 부새롬, 윤한솔, 이연주가 각각 짝을 이뤄 초청되었다. 6기 동인 중엔 구자혜, 백석현, 신재훈 연출이 참여했다. 이양구는 작가로(신재훈 연출), 마두영은 연출로(가와무라 다케시 작) 함께했다. 불볕더위 한가운데 총 8개 작품이 혜화동 1번지에서 관객을 마주했다.

특히 올해 첫 무대를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이 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출연진 모두 세월호 유가족 당사자이자, 이 프로젝트의 존재 이유였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류성 원작, 김태현 각색/연출)라는 작품명이 말하듯, 관객을 울렸다, 웃겼다, 들었다, 놨다, 죽였다, 살렸다, 하는, 그런 공연이었다.

닫힌 문, 사라진 이웃

무대에 네 개의 문이 나란히 서 있다. ‘안산빌라’ 1층, 101호부터 104호까지. 101호에는 할 일 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청년 나세찬(이미경 분)이 홀로 산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자부하지만, 주변에선 그저 놀고먹는 백수로 치부한다. 옆집 102호에는 중년 남성 한대철(김명임 분)이 고등학생 딸 한소리(김도현 분)를 홀로 키우며 투닥거리는 일상을 반복하며 산다. 세찬과 대철은 옆집 이웃이지만, 늘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만나는 족족 다툼을 일으킨다.

소란스러운 그들 사이로 104호에 사는 신순애(김성실 분)가 미스테리한 기운을 업고 지나간다. 신순애가 등장하면 소란은 중단되고, 모두의 시선은 순애로 향한다.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지나다니는 순애를 왜인지 다들 기피하는 듯하다. 세월호 유가족이기 때문.

이런 그들 곁으로 할아버지 김영광(박유신 분)이 이사 온다. 103호 주민으로 새 이웃이 된 그는 옆집 문을 두드리며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안산빌라 주민들은 이웃의 손길이 낯설다. 이사 온 기념으로 떡을 돌리려는 영광의 노크를 거절하고, 반갑게 인사하며 흔드는 손을 무색하게 한다. 연극은 낯선 도시로 이사 온 영광의 시선에 맞춰 그가 적응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요컨대 김영광 할아버지의 ‘이웃-되기’가 이 극의 요추다.

부녀회장을 필두로 한 빌라 주민들은 101호에서 104호까지 각각 가정들에 관해 뒷담화를 나누는데, 이를 통해 안산빌라 1층 주민들이 사회에서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사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101호 나세찬이 시끄러운 백수 청년이라며 투덜대고, 102호 아저씨 한대철은 인상이 무섭다고, 그래서 마누라가 집을 나간 것이라며 험담한다. 새로 이사 오는 103호가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김영광 할아버지를 마주한 그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동네 주민들 말마따나, 안산빌라 1층 가족들은 모두 사회가 정한 ‘평범’과 ‘일반’의 기준에 못 미친다. 혼자 사는 청년 백수(101호), 한부모 가정(102호),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친 아들과 그를 수발하는 노인 가족(103호). 그 모든 가족들 중에서도 유독 따로 분리된 이웃이 있었으니, 바로 104호에 사는 세월호 유가족 신순애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김영광 할아버지가 이사 오기 전까지 이웃집의 문은 함부로 두드릴 수 없었다. 영광은 떡 돌리기에 실패하고, 인사와 말 걸기도 거부당하지만, 내민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옆집 문을 두드린다. 결국, 서서히 이웃집의 문들이 차례로 열린다. 101호 세찬은 영광이 대접하는 떡과 닭죽에 감동하며, 102호 대철은 영광이 내놓은 막걸리 한 잔에 마음 문을 연다.

기세를 몰아 영광은 ‘금단의 영역’인 104호 문까지 두드리려 한다. 그러나 주민 모두가 그를 만류한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얘기를 건네는 것은 “불편하고”, “조금 그렇다”는 이유다. 한때는 함께 평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일상을 공유했으나, 이제는 함부로 말 걸기 꺼려지는 존재가 된 신순애. 영광은 이웃들이 순애를 대하는 모습을 두고 “딱한 사정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며 나무란다. 그리고선 수차례 104호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그날 저녁, 순애는 결정적인 순간에 문을 연다. 영광은 급작스러운 이상 징후를 보이는 아들로 인해 이웃들의 도움을 요청한다. 한밤중이어서 아무도 응답을 안 하고 있을 때, 순애가 유일하게 문을 열고 김영광을 맞이한다. 그리고선 이웃들에게 신고 요청과 응급 처치를 지시하며 영광의 아들을 살린다. 이웃에게 지워졌던 존재인 그녀가 이웃을 살리는 ‘컨트롤 타워’가 된 순간이었다.

어저께 자네가 열어준 덕분에 우리 아들이 것이여. 고맙네고마워

영광은 순애의 손을 꼭 붙들며 감사를 표한다. 이를 계기로 순애는 그간의 사정과 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영광을 비롯한 이웃들은 순애를 위로하며 손을 잡는다. 덕분에 순애는 예전의 발걸음과 목소리를 회복한다. 홀로 고립된 방문을 열고 이웃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자식 잃은 슬픔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문을 열고 이웃을 마주함으로써 웃을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 이웃에게 고통과 슬픔을 공유함으로써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었다는 점에 연극은 집중한다.

연극은 안산빌라 주민들이 평상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각자 방문을 닫고 살았던 이웃이 말 그대로 ‘식구(食口)’가 된 것이다. 그렇게 타자와의 연대는 ‘문 두드리기’로 시작해 ‘식구 되기’로 완성된다.

비극이 코미디로, 참사에서 일상으로, 타자가 이웃으로

세월호 유가족/미수습자 가족은 그 누구도 닿지 못할 비극을 겪은 이들이다. 그 당사자들이 택한 텍스트는 역설적이게도 코미디였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를 ‘코믹소동극’이라고 규정한 김태현 연출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대표적 예가 ‘직접화법’이다. 카카오톡 메시지, 실제 인물 등을 언급하며 돌직구를 날린다. “순실이 나쁜 X, 박근혜 못된 X, 뉴스는 제이티비씨”를 읊으며 자신도 ‘알 건 다 안다’고 너스레 떠는 김영광 할아버지의 대사에 객석은 폭소한다. 중간마다 ‘세월호 유언비어’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인물들은 박력 있게 “이런 씨X”이라며 통쾌한 욕설로 응징한다.

연극에서 직접화법은 장단점이 뚜렷하다.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전달하기엔 용이하지만, 그 때문에 촌스럽게 보일 수 있다. 자의식과 감정의 과잉으로 인해 거부감을 불러올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는 그 직접적인 대사를 외치는 배우가 누구인지를 알기에, 그것이 과잉된 감정이라거나 엇나간 분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한 파토스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유머와 미소를 곁들임으로써 무대에서 던진 돌직구는 관객의 공감과 의분으로 확장된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는 연극과 일상의 경계선에 걸쳐 있기 때문에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연극은 희극이든 비극이든 결국엔 모두 이웃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장르가 아니라 ‘고통의 연대’라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경계를 무너뜨린다.

죽임 당한 이웃, 이웃을 살리다

혜화동 1번지의 ‘세월호’ 기획은 연극계의 유명 연출가와 극단들이 참여해 왔다. 반면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은 철저하게 아마추어적이다. 그러나 ‘세월호’와 만날 때 ‘아마추어’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게 된다. 이 극의 미덕은 프로의 화려함에 맞서 아마추어적 일상과 현실을 내세운다는 점에 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프로다움’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드러낸 사건이다. 운항에 제일 프로페셔널이어야 했던 선장은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했으며, 구조에 프로답게 임해야 했던 해경은 시종일관 우왕좌왕했고,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컨트롤해야 했던 정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며 제 존재를 망각한 채 방관했다. 프로의 규칙들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맡겨진 임무에 충실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너무나도 잘 수행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제 영역에서 프로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비참히도 잘 안다. ‘프로다움’이 더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고발한 사건, 그 프로다움이 도리어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을 폭로한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따라서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가 ‘세월호 2017’의 개막작으로 오른 것은 상징적이다. 프로다운 것들만 무대에 서야 한다/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상식에 대한 도전이자, 가장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자리 옮기기’를 시도함으로써 무대 한가운데 주체로 우뚝 선 사건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무대 밖 타자가 아니다. 무대 위 ‘깍두기’도 아니다. 서로의 손을 잡은 무대의 주체들은 객석을 향해 이렇게 노래한다.

시간이 흐르고 모두가 잊어도 우리는 기억할게요. 울지 마요. 아프지 마요.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간의 타임라인들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스쳐 간다. 수없이 들었던 ‘잊지 않겠다’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노래로 불릴 때, 그 어떤 말보다도 두껍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위로를 건넨다. 이웃에게 죽임당한 사람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이웃을 살린다.

이웃을 소외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이웃이 있음을 알려준 사건이 바로 세월호 참사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는 그 참사가 아직 우리 한가운데에 있다고, 그로부터 고통 받는 이웃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알려주는 연극이다.

우리 옆엔 이웃이 있다. 세월호엔 아직 사람이 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1235일째(2017년 9월 1일 기준) 되는 날이다.

(사진 제공 – 416가족극단 노란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