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6일 저녁 8시 보신각 앞, 서로 다른 색깔의 헤어밴드를 하고 풍선을 손에 든 4인의 ‘참여관객’들이 대형 프랜차이즈 브랜드 로고들로 채워진 말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말판은 ‘경기장’으로 불렸고 관객들은 말판 위에도 말판 밖에도 존재했다. 부루마블을 연상케 하는 말판이 경기장이라면 앞으로 여기서 벌어질 일은 경기, 즉 ‘게임’일 것이다. 그렇다면 ‘참여관객’은 ‘플레이어’이고 말판 주위에 빙 둘러앉은 관객들은 경기를 보려고 온 ‘관중'(‘관객’과 ‘관중’ 사전적으로 유의어 관계이나 여기에서 ‘관객’은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의 그것으로 한정하여 서술하기로 함)이다.

게임의 형식과 규칙은 부루마블을 변용했다. 플레이어들에게는 2017년 현 근로기준법에 근거한 법정 최저시급 6,470원과 월 통상임금 산정시간인 209시간으로 계산한 월급 1,352,230원과 HP 100이 지급된다. 말 칸을 한 바퀴 돌면 한 달이 지난 것으로 월세 40만 원이 차감되는 것과 동시에 HP 20을 얻는다. 2개의 주사위를 던져 주사위 눈의 수만큼 이동하는데, 노동 칸에서는 돈을 버는 대신 HP가 소모되고 소비 칸에서는 돈을 쓰고 HP를 회복시킨다. 노동/소비 칸 외에도 보상과 패널티가 걸린 특수 칸이 있는데, 가령 우울증 칸에서는 3턴 동안 이동하지 못하거나 스마트폰 파손, 공과금 납부, 경조사 참석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이 나가는 식이다.

공연 이틀 전,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에서는 ‘6470원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라는 또 다른 제목의 프로젝트가 목표 금액을 달성하고 후원 마감되었다. 주된 리워드는 보드게임 패키지와 거리공연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 관람, 그리고 이 공연의 ‘제작관객’이 되는 것이었다. 해당 프로젝트에서는 보드게임 패키지가 ‘연극을 위한 도구 세트: 연극 KIT “rodong.zip”‘로 명명되고, 주사위/설명서/인물(말)은 ‘대본’, 말판과 카드는 ‘무대’로 치환되어 있었다. 그리고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안무: 노동움직임’이 수록되어 있었다.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는 연극을 구성요소 단위로 해체해 (보드)게임의 문법으로 재구축한다. 해설, 대사, 지문으로 채워지는 희곡은 게임의 ‘규칙(Rule)’으로 대체되고, 이동 가능한 말판이 설치되는 평지는 그 장소가 어디든 무대로 탈바꿈한다. 공개 모집된 ‘참여관객’은 ‘플레이어(Player)’로서 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플레이(Play)’를 이어나가며, 양식화된 움직임이 아닌 “상식적인 범주에서 생각했을 때” 각 말칸에 상응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별 매장에서 볼 수 있는 노동/소비 행위를 직관적으로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참여관객은 두 번 이상 공연에 참여할 수 없으며 리허설 또한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

<노동집약적 유희>에서는 출연진 중 그 누구도 정형화된 연기를 하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으로서 게임을 수행하는 참여관객 뿐 아니라, 주심과 아나운서/캐스터 역시 일종의 컨셉은 있으나 그 안에서 어떤 일관된 캐릭터나 서사를 찾기는 힘들다. 물론 가공된 이야기 구조를 따르지 않는 작품들은 이 외에도 존재하며, 종종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분류되고 만다. 그러나 <노동집약적 유희>에 ‘인물’이 아닌 ‘배우’가 부재가 두드러지는 것은 애초에 작품을 이끌어가는 참여관객들이 게임의 ‘플레이어(Player)’로서 포지셔닝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가 부재한 연극을 과연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송이원 연출은 <노동집약적 유희>가 게임의 형식을 취할 뿐 자신은 다원예술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연극’으로 만들었다고 답하며 의 작품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또한 연출의도에서 ‘Theatre’의 어원을 인용하여 극장을 오롯이 관객의 것으로 두고, 관객을 ‘지켜보는 자’인 동시에 ‘반응하는 자’, 나아가 ‘행위하는 자’로 재정의하기도 했다. ‘행하다’라는 뜻의 ‘Act’와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명사형 접미사 ‘-or’이 결합하면 ‘Actor’, 즉 ‘배우’로 번역되니 ‘행하는’ ‘관객’만 존재해 준다면 연극에서 실제로 배우가 사라진다 해도 연극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의 보신각 공연과 제18회 서울변방연극제 프로그램은 한 달 여 간격으로 도심 한복판 야외 공간과 여건이 잘 갖춰진 쾌적한 공연장에서 각기 이루어졌다. 2015년 12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노동집약적 유희 2016>로 시작하여 2017년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거리공연에 도전하고 한 달 여 뒤 다시 극장으로 돌아갔다. 보신각 앞에서는 평소에도 옥외 집회와 행사가 심심찮게 열리는 곳이고, 보신각과 불과 300m 거리인 CKL스테이지는 종로구뿐 아니라 서울 시내를 통틀어 꽤 손꼽히는 퀄리티의 공연장이다. 물리적인 환경도 사회적 맥락도 너무나 다른 공간들이다.

장소(Venue)에 따라 관객의 관람의 접근과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실제로 보신각 공연을 본 관객들의 경우—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든, 잠깐 머물다 떠났든 간에—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며, 심지어는 이것이 ‘공연/거리극’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대상을 날 것으로 마주했을 때와 공연임을 인지하고 극장에 들어설 때의 ‘관람 행위’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도심 한복판에서 관객을 조우한 작품이 마치 야생에 던져진 상태나 다름없는 것처럼, 그 공연에 한한 무지한 상태의 관객 역시 관람에 대한 결정 자체가 일종의 모험이고 도전인 것이다.

장소(Venue)가 달라지면 작품과 관객 간의 간격/관계도 변한다. 송이원 연출이 의도한 두 공연의 차별 지점은 명확했다. 송이원 연출은 서울변방연극제 관객과의 대화에서 “말판(무대 영역)과 객석의 거리를 띄우고” “방송 스튜디오처럼 연출”하여 “공연을 하나의 정보와 이미지로서 전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CKL스테이지에서는 카메라 3대가 동원되어 실시간으로 플레이어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여 스크린에 띄우거나 영상 전환의 속도/빈도를 높이는 등의 생방송 중계를 표방하는 시도가 돋보였다. 그럼에도 보신각 공연 이상의 몰입과 호응이 이어졌고 관객들의 집중도도 전체적으로 높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송이원 연출이 말판 위에 구축해놓은 세계가 그만큼 공고했기 때문이다. 이동형 무대인 말판이 어떤 장소에 펼쳐지는 순간 그곳은 공간의 물성이 아닌 게임의 규칙(Rule)에 지배를 받게 된다. 프로덕션 디자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게임의 규칙으로 수렴되고 그와 동시에 ‘연극’의 개념도 말판 위에서 재조립되는 것이다. 게다가 게임이나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은 본디 환경이나 매체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에 감정적으로 이입하는 주체들이다.

송이원 연출은 실제로 두 공연에서 관객(혹은 관중)에 관하여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선보였다. 특히 거리공연에서는 참여관객-제작관객-일반관객(지나가다 우연히 관람하게 된 관객을 칭하는 것으로 한다)의 세 층위가 존재했고, CKL에서는 공연 초반에 ‘참여관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플레이어를 완전히 게임 내부에 집어넣고 이전 공연들과 다르게 관객들을 말판과 물리적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문제는 플레이어들에게 ‘참여관객’이라는 라벨링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관객의 입장에서 플레이어들에게 느끼는 정서적 거리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참여관객은 본질적으로 작품과 관객 사이에, 그것도 관객과 정서적으로 상당히 가까이 놓이게 된다. 허구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경기에 참여하는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주사위 눈이 원하는 대로 나오면 기뻐하고 뽑은 카드의 지령이 보상이 아닌 패널티일 때 좌절하는 모습 모두 플레이어들의 감정이 즉각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여기에 관객들이 이입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은 말판 위 세계와 게임의 규칙들이 곧 현실의 반영이자 대유(代喩)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갖가지 변수에 둘러싸여 바로 다음 행선지조차 예측할 수 없지만 말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어김없이 월세 40만 원이 빠져나가고 돈/HP의 유무에 소비/노동 행위에 제약을 받는 것까지 지독하게 현실을 닮아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객석의 관중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적 경험과 감정을 플레이어들에 투영하고, 플레이어들 역시 관객들과 정서적으로 상호작용하게 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플레이어와 관객들의 연대가 강해지는 반면, 정작 물리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말판과 관객 사이에 위치한 아나운서/캐스터는 공연 안에서 겉돈다. 서울변방연극제 관객수다회(관객비평단)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한 마디로 정리하면 참여관객 이외의 출연진들에게 서사가 좀 더 확실하게 부여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가령 캐스터를 ‘9N년도 <노동집약적 유희> 우승자’로 소개하는 멘트조차 캐릭터 구축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아무런 효용 없이 그대로 휘발되어 버린다. 아나운서와 캐스터가 간간히 애드리브를 시도하지만 대사의 대부분이 리액션에 그치는 점 또한 아쉽다.

<노동집약적 유희>는 우연발생적인 일련의 사건들이 즉흥적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가고 상호작용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게임의 프레임 안에서 관객들은 플레이에 동화됨으로써 작품의 흐름과 관객의 정서가 밀접하게 맞닿는다. 그나마 잠시 쉬어가는 ‘광고타임’조차 전면부에 위치한 스크린 가득 영상들로 채워진다. 사전에 철저하게 짜인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음에도 작품의 밀도가 높은 이유다. 여백과 간격이 주어질수록 관객이 사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몰입의 순간에서 빠져나오면 어쩐지 여운보다는 허무감이 밀려온다. 사유와 여운을 좀 더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 역시 필요해 보인다.

그는 또한 이번 <노동집약적 유희 2017: 테마파크> 거리공연과 함께 진행한 ‘rodong.zip’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언급하며, “어떻게 해도 저희한테 연극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그에 앞서 “‘(어떤) 공간에 들어가서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는 게 연극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송이원 연출에게 ‘연극’이란 기존의 공식을 연역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낯선 공간에 자신이 만든 세계를 구축하는 일처럼 보였다. 스스로 말판 위에 독립된 세계를 구축하여 자신만의 ‘룰’로 극장을 지어 올린 것이나 다름없다. 대단한 역량이다. 이 세계의 외연이 어떻게 확장될지가 기대된다.

(사진 제공 – 송이원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