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이라는 테마 아래 <널 위한 날 위한 너>가 국립극단에 올랐다. ‘디아스포라’가 환기하는 것은 이산의 고통, 충돌하는 정체성, 분열적인 삶이다. 그리고 우리는 쉽게 고통 앞에 웅크린 타자를 상상한다. 한국사회는 여태껏 타자를 대면하고 경계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를 공론장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같은 인종과 언어, 문화를 공유한 동류만이 완전체를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온 것이다. ‘우리’라고 정의된 집단 내에서조차 소수자 구별 짓기와 배제는 흔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안에서 문화 콘텐츠 속 여성 타자들은 몇 가지 모델에 국한되어 등장했다. <널 위한 날 위한 너> 또한 그중 하나를 채택하고 있는데, 문화수용을 전제로 제국이 시민권을 부여하고 합법적인 환대를 통해 자문화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근저에는 다시-경계 넘기라는 안정장치가 포함되어 있다. 분리된 공간을 하나의 상징적 배경으로 묶어냄으로써 이데올로기를 상쇄시키고, 두 인물의 운명과 정서에 집중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여름 끝자락에서야 이 이야기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상처받으며, 회복에 대한 갈증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널 위한 날 위한 너>는 국경을 넘는 자매, 민희(문현정)와 준희(신사랑) 두 중심인물로 하위주체의 얼굴을 구성한다. 그리고 탈북 과정에서 재현되는 ‘타자’들의 현장은 적나라한 공포와 죽음 대신 허구적인 이미지로 조립된 초현실적 시공간이다. 민희와 준희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사 공간을 벗어나 각자 다른 세상으로 탈주하게 된다.

극의 시작점은 자매가 마주 보고 앉은 식탁 장면, 즉 단절 이전 상태다. 언니 민희의 조촐한 생일상에 차려진 것은 냄비 안에 든 음식 조금뿐이다. 이들은 극심한 궁핍 상태에 몰려 굶주리면서도 한사코 서로에게 음식을 양보할 정도로 애틋하다. 쌀죽 한 그릇만 모자란 게 아니라 병약한 민희를 위한 치료제도 부족한 상황이다. 열악하고 부조리한 의료시스템 속에서 언니 민희의 몸은 점점 피폐해져 가고, 동생 준희는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탈북을 결심한다. 절박한 경제 상황이 묘사되면서 체제의 피해자라는 탈북서사의 전형성이 충족된다. 하지만 이후 전개에서 드러나는 것은 움츠러든 타자의 형상을 넘어 우물이라는 상징적 공간 속에서 이동하고 확장되는 타자의 반경이다. 암전으로 연출되는 잦은 배경 전환은 산란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빠른 속도감과 정주하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새삼 상기시킨다.

무대에는 단차를 이루는 층계와 그 사이에 들어선 작은 경사로, 검은색 직선으로 그어진 띠들이 어지럽게 무채색 바닥을 채운다. 그리고 등퇴장용 통로 두어 개, 표지판처럼 생긴 조형물, 문짝 등이 비틀린 채 세워져 있다. 이야기는 북한과 미국,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조 속에서 계열화되지만 ‘우물’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이 무색해진다. 대신 분명하게 벌어지는 것은 두 사람이 감각하는 시간이다. 또 다른 우물로 들어선 준희가 수년을 사는 동안 민희의 시간은 고여 있다. 준희가 미래를 경험하는 동안 민희는 현재에 없는 아들과 남편을 찾아 과거로 침잠한다. 이처럼 어긋나고 왜곡된 이미지가 증폭되는 것은 언니 민희의 세계다. 그는 깊은 우물 속에 빠져 알 수 없는 길로 흘러들고, 조난자가 아니라 기괴한 동화에 갇힌 주인공으로 분한다. 이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은 추상화된다.

이것은 누구의 꿈일까? 탈출에 실패한 민희가 만들어낸 매트릭스일까. 홀로 살아남았다는 가책에 봉인되어 준희가 직조해낸 환영일까. 깨어나지 못한 생존자의 미몽일까. 애도를 유예하고, 만남의 가능성을 지속시키려는 한 편의 상상일까. 민희가 있는 곳은 준희가 겪는 일상세계의 물리적 시공과 구별되고, 기이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위협적이다. 개구리와 곰을 만나 대화하기도 하고, 자매가 배불리 먹지 못했던 쌀이 살아 움직이면서 악기를 연주한다. 다른 국경 이탈자와 맞닥뜨리곤 민희가 그를 돕기도 한다. 생사를 걸고 국경을 넘는 파국 속에서 이러한 판타지가 마련되었다면 이는 디아스포라가 재구성한 잠재적 시공간일 것이다. 민희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심리적 사건 속에 존재하면서 과거를 현재로 유인한다. 그 결과 남편의 끔찍한 최후, 그리고 아들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우물’이라고 약속된 이 공간에 물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샘물이 솟구치는 생명의 이미지 이면에는 바짝 말라버린 돌무덤이 있었다. 초현실의 심연에는 참담한 현실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이 현현했을 때, 주체는 신의 목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처럼 노동을 통해 구축한 자기 세계를 버리고 세계 저편에 있는 타자에게로 간다.”

-서동욱 ⌜차이와 타자⌟ 中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이기적’ 주체가 타자의 고통 받는 얼굴과 마주칠 때, 윤리적 주체로 전화하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준희는 자신이 속해있던 공동체와 단절하고, 난민 신분으로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차차 영어에 적응하는 둥 미국 사회에 통합되기 위한 여정을 이어나간다. 주류사회가 공유하는 기호체계를 하위 주체가 학습함으로써 ‘시민’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것이다. 그는 제법 성실한 이주자로서 강도 높은 노동에 대한 더 나은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게 되었다. 또 자기검열 없이 미국 사회를 비판하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이국의 풍토나 관습의 제약 없이 표면적으로는 무난한 일상을 살아간다. 황선화 배우 한 사람이 일인다역을 소화하면서 개성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연기했는데, 이방인 준희의 시선으로 뉴욕 여성들을 범주화했다는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 연인은 트라우마 해소를 위한 정서적 지지기반을 제공하지만 극복되지 못한 상실감이 준희로 하여금 (비록 그것이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행위가 아닐지라도) 또다시 국경을 넘게 만든다. 어떤 미래든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자신에 비해 민희가 아직도 고인 시간에 머물러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한편 민희는 쏟아져 나와 튀어 오르는 개구리의 습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런데 운명이 변주되고 반복되면서 이번엔 준희가 사지로 내몰리고, 민희는 한국으로 탈출하게 된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반복과 변주가 재현되는데, 이제 식탁에는 첫 장면에서 마주 보던 두 사람이 아니라 민희 혼자만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언젠가는 또 운명이 회귀할 것을 알고, 그날까지 잘 살아내겠다는 듯 천천히 밥알을 넘긴다. 이 구조에서 어떤 사건이 극 중 현실인지, 어떤 우물 세계가 원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신적 구속 상태에 빠진 타자의 고통을 함께 목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장에서 밀려난 타자들의 시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나아가 이에 하위주체의 감각이 얼마만큼 담겨있는가 하는 것에 창작자의 시선이 머물 때가 되었다. <널 위한 날 위한 너>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리얼리즘이라는 비참상 안에 가두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두 여성은 하나의 시스템에 유연하게 통합되는 ‘착한’ 시민으로 제시되거나 트라우마에 갇혀 신비화된 타자로 대상화됨으로써 강한 연민의 시선이 이들을 관통하고 있다.

(사진 제공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