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은 ‘기타-비평’이 아니다.

: 이 자리는 서울시 청년예술단(이하 서청예) 지원사업 덕분에 만들어진 자리다. 연극 분야에서 비평 팀이 뽑힌 게 굉장히 의미 있다고 본다.

: 사실 서청예 내 연극 지원 분야에 비평은 따로 없었다. 창작자 중심으로 지원을 받고 있어서, 연극이 아닌 문학으로 지원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문학은 발간, 비평 등이 있었으니까. 서청예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어디로 지원을 해야 하나 물어보니 그들도 당황하더라. 연극 분야 내에 ‘비평’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둔 것 같지 않았다. 현재는 서청예 연극 분야에 비평 팀이 두 팀이 있다. 이 상황 자체가 연극계 안의 비평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서청예 워크숍을 갔더니, 비평은 연출, 배우, 작가처럼 독립적인 역할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기타’에 속해있었다. ‘비평’ 파트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더니 그냥 ‘기타-비평’으로 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 지금 비평의 중요성, 비평가의 존재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왜 연극계에서 비평가의 역할은 뒷전인건지. 연극은 공동체 작업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그 공동체에 들어가는 인원은 얼마 없다. 연출, 작가, 배우. 그 외의 사람들은 부수적인 존재들이다.

: 우리 여기 있어요!

비평가 ‘선생님’의 연극 ‘봐 주기’?

: 대개 문화예술의 주체라고 하면 제일 먼저 ‘창작자’, ‘관객’, ‘기획자’ 등을 말하곤 한다. “왜 ‘비평가’나 ‘연구자’는 언급조차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왜 비평가는 주요한 주체가 되지 못할까. 실제로 모든 예술계 지원마저 창작자에 집중된다.

: 창작자와 비평가도 상당히 분리되어 있다. 서로 피드백 주고받으면서 생산적인 활동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건지.

: 프린지페스티벌에 갔을 때 비평을 한다고 했더니, 어떤 아티스트가 “‘비평한다.’고 하면 아티스트들이 싫어한다.”고 하더라. 창작자들이 비평가에게 갖는 시각이 그런 것이다.

: ‘평론가는 권위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모사업 심사를 평론가들이 주로 맡는다고 생각하고, 평론가는 대개 교수라 생각해서 평론가를 곧 ‘권위자’라 여기는 것 같다. 평론가의 글 역시 비평글 자체로 여기기보다는, 평가의 지표 혹은 심사를 위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젊은 창작자들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 지인 작품을 보러갔을 때, “작품 어때?”라고 캐주얼하게 물어보기보다는 “평론가 선생님, 어떻게 보셨는지 말해주세요.”라는 식의 농담 섞인 말을 자주 듣곤 했다. 2-30대는 진보적이고 기존 질서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창작자들 역시 갑을 관계나 위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이를 똑같이 답습하는 것 같다. 젊은 사람들마저 창작자와 비평가의 경계를 나누고, 그 안에서 위계를 만드는 듯하다.

: 나도 주변에 공연하는 친구들이 “우리 공연 좀 봐줘”, “객관적으로 써줘”라고들 많이 한다. 근데 이 “봐줘”, “써줘”라는 말 자체가 이미 위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 또한 비평가는 ‘객관적으로’, ‘잘’ 읽어줘야 한다는 인식도 깔려있는 것 같다. 비평도 한 사람이 쓰는 것으로, 주관적 의견이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창작자들은 비평가가 자신이 납득할 만한 글을 쓰지 않으면 이를 그저 감정적으로만 대응하려 한다. 그 태도가 문제 아닌가.

: 학교에서 성숙한 방식으로 비평을 하고, 또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연극학과가 4-50개 정도 있다고 알고 있다. 여기서 작품을 만들거나 연기하는 방법 등은 배울 수 있지만, 건강하게 비평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 한다. 연극을 평가하는 건 늘 높은 사람의 몫이었다. 그리고 학과 내에서는 위계질서가 명확한 분위기가 설정돼 있다 보니, 후배가 선배 공연을 평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서 그렇게 자란다.

: 비단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제로 작업 현장이 평단과 대립각을 세우는 사건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창작자에게 비평이 건설적인 위치로 인지되지 못하는 것 같다. 서로의 작품과 비평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메타비평’이라는 순구조가 존재하나 사실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메타비평이 활성화되었다면 과연 창작자와 비평가가 감정적으로 대립되는 일들이 발생할까 싶다. 사실 작업 현장에서는 비평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비평의 언어를 감정적 코멘트로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비평 문화가 올바르게 정착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다.

비평가도 예술가다.

“5편 모두 평균 이상의 ‘공연읽기’ 수준을 보였지만 연극평론의 존재이유를 잘 모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 유감이었다. ‘연극평론’이란 글이기에 일차적으로 기록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먼 훗날 후손들이 이전에 이루어진 어떤 공연에 대해 상상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남긴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연극평론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공연과 관객의 매개체로서 전문적이 아닌 일반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쓰인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연극평론가는 작품에 대해 재단(裁斷, evaluatiion)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오늘’과 맞닿는 지점을 제시함으로써 일반 관객이 공연읽기에 차츰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2016 SPAF 젊은 비평가상 심사평

: 비평의 일차적 역할이 기록인가?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 하고, 연출가의 의도는 무엇이고. 비평가는 그저 작품을 설명해주는 사람으로 그쳐야 하는 것인가? 나는 비평 역시 하나의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매개로 연극과 사회를 연결시키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그것이 비평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평가가 주체적일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 연극계는 너무 창작자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비평은 작품의 해설을 돕기 위한 도구로 그 역할이 제한되고, 비평의 언어는 객관을 요구 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비평이 객관적일 수 있나? 평론가는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 나는 ‘객관’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하는 편이다. 객관이 어디 있나? 비평가 본인의 주체성이나 캐릭터가 많이 담길수록 비평이 ‘도구’적인 영역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한다. 대개 비평을 아카이빙의 도구로 간주하는데, 지금 같은 시대에 왜 비평의 역할을 아카이빙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이미 영상, 이미지 등의 좋은 매체들이 존재하는데 말이다. 물론 다양한 층위로 아카이빙을 할 수는 있지만.

: 우리 전(前) 세대 같은 경우에는 그랬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연 영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었으니, 비평문에서 묘사하는 표현들을 보고 그 공연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이 변화하면서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게 생긴다면 비평가의 역할은 아카이빙 이상으로 더 넓어져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 작년 SPAF 젊은 비평가상 심사평을 보면, 기성세대는 평론가의 위치를 관객보다 ‘위’로 설정하는 것 같다. ‘공연과 관객의 매개체로서 전문적이 아닌 일반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쓰인다.’, ‘일반 관객이 공연읽기에 차츰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등의 문장을 보면, 관객이 공연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공연을 비평가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비평가는 누군가를 계몽, 계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한다. 감상평을 발전시켜 글로 남기기에, 보다 주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도 아닐까. 비평가가 관객들에게 ‘이 공연은 이렇게 봐야해’라고 알려줄 수는 없다.

: ‘연-필’ 코너가 좋은 이유가, 작품이 우선이기보다 비평가 본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글’이 우선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잘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놓치는 것, 혹은 전공자들이 프레임 안에 갇혀 놓치는 것이 뭘까 생각한다. 그래서 창작자들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처럼 비평가들도 ‘다르게 보기’, ‘새롭게 보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좋은 말이다. 창작자, 비평가를 떠나 ‘예술’이 해야 하는 역할인 것 같다. 공연을 보러 가는 행위 자체가 해당 예술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보고 생각할 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따라서 창작자는 자신의 의도가 마치 진리인 양 그 의미를 파악하라 하지 말고, 관객이 주체적으로 읽고 사유할 수 있는,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관객은 창작자의 생각을 추측하는 듯한 단편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다양한 생각들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서 비평가의 ‘다르게 보기’가 중요하고 필요한 것 같다. 일반 관객이 캐치하지 못하는 것 이상의 더 많은 해석과 생각들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관객 모두가 비평가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비평이 반드시 비평가만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 생각한다.

: 나는 오히려 ‘다르게 보기’에 갇힐 수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웹진 사업이 시작될 때 ‘젊은 비평가의 새로운 장’이라는 시선이 많았다. 근데 젊은 비평가들은, 어떻게 새롭고 다르게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우리 역시 제도권 교육 안에서 자랐고, 새롭다 말할 수 있는 비평을 보지 못하지 않았나. ‘다른’ 비평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모르겠다. ‘다름’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은 설정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비평의 이상적인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탈권위적이며 창작자의 절대적인 목소리에 반항할 수 있는 해석을 지향한다.

: 나도 동의하는 바다. 창작자가 하고 싶은 말이 생겨 공연을 만들 듯이, 비평가도 공연을 보고 할 말이 생기기에 글을 쓴다. 형식이 다를 뿐이다. 비평가가 어느 공연을 어떻게 읽어줘야 하는 존재는 아니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인 것처럼, 비평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임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 중요한 것은 소통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평, 평론, 평가 등의 ‘평’이라는 글자가 싫다. ‘평’이 평가의 의미가 아니라, ‘평평하다’의 ‘평’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권위, 계급, 아카데미, 라인 때문에 비평이 존재 자체의 의미를 채우지 못했다. 이제는 소통하는 비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평’은 작품이 다시 만들어질 때 그 역할이 부각된다. 작품이 더욱 풍성해지고, 많은 사람과 공유될 수 있도록 ‘평’이 그 중간 과정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존재 의미가 더 부각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저 ‘평’으로만 끝나면 권력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평은 ‘기타-비평’이 아니다. 비평은 ‘비평’ 그 자체다.

: 문제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긍정적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타’ 부류로 들어가는 현실을 진단했다. 현실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비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젊은 비평가로서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해야한다는 것에 필요성을 느끼고, 연극 생태계에서 비평가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 나는 비평이 꼭 연극하는 사람한테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의 층위가 자라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비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비평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SNS나 일기장에 써야할 글을 ‘비평’의 이름을 달면 안 되지 않나. 최소한의 고민과 사유는 해야 한다. 너무 날 것의 언어로 구사되는 비평은 비평이라 하기 힘들 것 같다.

: 생각은 날 것일수록 좋고, 표현은 정제될수록 좋은 것 같다. 생각은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고 작품과 ‘나’ 사이에 드는 생각 그 자체의 날 것으로 이루어지되, 표현은 정제되고 신중해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 그럼 비평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 비평은 연극의 진정한 친구다. 비평은 권위와 서열, 위아래, 좌우 없이 작품과 동등한 위치에서 편하게 말 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존재여야 한다. 비평이 연극 친구를 위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 비평은 창작의 하녀가 아니다. 비평 역시 창작이다.

: 비평도 예술이다. 비평 없는 예술이 예술일 수 있을까?

: 비평은 ‘기타’가 아니다. 비평은 ‘비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