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연극제’에서 ‘늘푸른 연극제’로 명칭을 바꾸어 진행한 연극 축제의 개막작은 배우 오현경과 연출 이성열, 극단 백수광부가 함께 꾸민 이강백의 <봄날>이었다, 한여름의 때에 ‘늘푸른 연극제’는 세월이 흘러도 연륜과 함께 깊어지는 마음은 늘 푸르다는 것을 원로 연극인들을 통하여 보인 시간이었다. 연극제의 의미를 생각할 때 개막작이었던 이강백의 <봄날>은 소멸과 맞물린 생성의 봄을 이야기로 부조한 공연이라는 점에 있어 적절했다.

움트려고 몸부림치는 꽃을 감싼 거죽 속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전쟁과 같은 봄이, 아버지와 일곱 명의 자식들을 통하여 그려졌다. 나른한 봄날 무대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흙담 위의 구렁이를 물끄러미 쏘아보는 차남의 모습으로 극은 시작된다. 먼 청계산에는 산불이 붙어 연일 타오르고 사남은 산불을 보면서 ‘봄 됐다구 암컷 수컷 모여서 뜨겁게 뜨겁게 부벼 대니까 불이 난다’고 말한다. 봄과 불의 이미지는 매양 아프고 힘이 없는 막내에게 있어 ‘봄만 되면 꽃가루가 날아와 숨을 막고, 숨을 못 쉬어서 가슴속이 불붙은 듯 뜨거운’ 증상으로 연결된다. 막내는 가슴으로 봄을 겪어 끄지도 못하는 불길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상태다.

봄날 청계산에서 꺼지지 않는 불, 일곱 형제의 막내의 가슴에 붙어 가시지 않는 불길 이외에 어머니 같은 장남에게 매번 이것저것 조르는 나머지 형제들의 아우성에도 불길 같은 성화와 불꽃같은 생명력이 존재한다. 극단 백수광부의 배우들이 표현한 건장한 다섯 장정은 심술궂기가 샛노란 구렁이 같기만 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그득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자기 슬하에 가두어 자기 것으로 쥐고 놓지 않는 천하의 욕심쟁이다. 자식에게 닭 한 마리 잡아주는 법이 없고 돈 한 푼도, 참기름마저도 내어주지 않는다. 두껍고 거친 거죽이 여린 꽃잎들을 가두어 놔주지 않듯. 거죽에 갇혀 웅크린 꽃잎들이, 빈속에 먹은 구충제로 인한 증상처럼 온 세상이 빙빙 도는 시름을 앓다가 어느새 거죽을 뚫고 나오고야 말 듯. 건장한 형제들은 빈속에 구충제를 먹고 밥 한 술도 못 먹고 쟁기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육남 봄이 싫어. 봄이 되면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뿐이지!

삼남 나도 싫어. 자식들만 실컷 부려먹구.

사남 샛노란 땅이 샛노랗게 빙글빙글 돌아.

오남 샛노란 하늘이 샛노랗게 뱅글뱅글 돌아.

차남 봄이 번이나 바뀌어야 땅이 우리 될까?

삼남 삶은 콩에 나와야 우리 되지.

육남 죽은 나무 피어야 우리 되지.

자식들 아아, 어지러워라!

희곡의 지면상 ‘노동착취의 현장’이던 형제들의 대화는 공연을 통하여 입체화되는 순간 빙글빙글 뱅글뱅글 돈다는 음성 발화의 묘한 현기증으로 진동하면서 거친 거죽을 뚫고 움트려는 왕성한 봄기운이 된다. 지팡이를 움켜쥐고 자식들을 휘어잡으려는 아버지는 갖지 못하는 역동적 생명력이 자식들에게 있다. 마치 거죽을 뚫고 터지기 직전으로 피어오른 꽃망울처럼 그것은 봄날의 소리 없는 전쟁이다.

형제들은 이내 봄에 대한 시들을 읊고 그리하여 봄의 시가 표현하는 이미지들은 육체를 통하여 무대 위에 던져진다. 봄에 대한 은유를 서사화하던 이강백의 <봄날>은 이야기를 멈추고 시를 통하여 봄의 이미지를 무대 위에 나열한다. 그리고 봄의 메타포는 불을 거쳐 어느새 사랑에 이른다. 동녀가 목욕을 하는 것을 돕던 막내는 숨이 막히고 이제 형제들은 봄에 대한 소설을 읽는다. 다시 한 번 <봄날>의 서사가 멈추고 사랑의 일렁임을 서술한 소설의 한 구절이 삽입된다. 그렇게 봄은 삽입된 이미지와 서사에 얽혀 불이 되고 사랑이 되면서 <봄날>의 서사로 자리한다.

봄의 불길과 그 불길로 피어 오른 사랑은, 어린 동녀의 열기로 잠을 이루는 아버지에게 동녀를 빼앗겨 우는 막내의 한이 되고 두견새 마냥 밤새 울며 피를 토한 막내의 베갯잇에는 핏자국 대신 무수한 붉은 꽃잎이 수놓아져 있다. 사랑의 한은 결국 개화가 된다. 꽃은 그렇게 기어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꽃잎이 피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죽은 양기를 취하여 다시 한 번 스스로 꽃잎이 되고 싶어 한다. 동녀의 열기로 젊어지는 기분을 겪고 정말 젊어지고 싶은 아버지에게 갈마재 무당 할멈은 ‘씨 뿌리면 금방 죽는다’는 존재의 순리를 가르쳐 준다. 봄은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품은 것들을 통하여 이어진다는 것을, 가슴에 불이 붙어 잠을 이루지 못하던 막내의 마음에서 시작한 사랑이 어느 새 개화로 화한 생성의 순간을 맞았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 길이 없다.

개화의 때를 만난 꽃이 거죽을 뚫고 완전하게 만개를 하듯 결국 형제들은 아버지의 눈을 송진으로 가리고 돈을 가지고 집에서 탈출한다. 죽은 나무가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기적처럼 결국 꽃잎은 그토록 단단한 거죽을 뚫고 세상으로 나간다.

극의 마지막은 더운 여름이다. 더 야위고 더 늙은 아버지가 앉은 초가의 지붕에는 전에 없던 둥근 박이 걸려 있다. 소멸을 앞둔 존재 위에 놓인 생성의 상징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한다. 거죽은 자신을 뚫고 나가 제각기 흩어져 날아간 꽃잎에 대한 그리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곁에는 첫째가 있고 막내의 아이를 잉태한 동녀가 있고, 몸이 아파 집에만 있던 막내는 어느 새 아내를 위해 신 것을 찾아 나서는 장정이 되었다. 소멸의 자리에 탄생의 기다림이 겹쳐져 있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무대 위의 공간은 세대를 걸친 생의 순환의 자리가 된다.

이강백의 <봄날>은 그렇게 봄을 이야기로서 풀어놓고 있었다. 올해로 86세를 맞아 아버지를 연기한 노배우는 대 무대를 육성(肉聲)으로 견디면서 힘이 붙인 듯 버티는 듯 실존과 재현의 경계에서 실감을 더해 주었다. 형제들의 모습을 보여준 극단 백수광부의 배우들 역시 거죽에 억눌리면서 약동하는 거친 봄 같은 생명력을 잘 표현하였다. ‘늘푸른 연극제’와 <봄날>은 정말 어울리는 만남이었다. 이번 연극제의 주역들이 ‘원로’인 것보다 ‘늘푸른’에 어울리는 것은 경험과 세월의 누적이야말로 소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생성에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 극단 백수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