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부터 현재(2017년 10월)까지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젠더 문제에 반응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2016년 5월) 이후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자 수많은 여성들을 비롯하여 몇몇 남성들까지도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사회에 존속해 있는 여성 문제, 나아가 젠더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소수자들 역시 자신의 인권 보장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성소수자 문제는 최근 있었던 군대 내 동성애 처벌 문제를 통해 사회적 이슈로 인식되며, 많은 논의거리를 안고 있다. 이처럼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성소수자 등 사회의 ‘타자’로 존재해왔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배제된 소수자들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사회 전면으로 드러나 사회 문제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 사회 곳곳에는 고착화된 성차별적 불평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가정, 회사, 학교 등의 다양한 형태로 구분되는 한국 사회 전반은 여전히 가부장제로 지탱되고 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서는 젠더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과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며, 그 형태 역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계 역시 젠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함께 여러 움직임을 보여 왔다. 지난 해 가을 SNS를 통해 ‘#예술계_내_성폭력’ 운동이 전개되어 예술계 내 뿌리 박혀있던 성차별/성폭력 문제들이 가시화되기도 했고, 특히 연극계에서는 김슬기 작가가 국립극단 앞 잔디밭에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담은 게릴라극 <페미리볼버>를 공연해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양분화되어 발생하는 성차별적 현실을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 밖에 <아주 친절한 (페미니즘) 연극>, <개인의 책임>등 젠더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젠더 문제에 관한 연극계의 지속적인 관심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젠더’ 문제를 작품 전면에 내세운 또 하나 연극이 있다. 혜화동1번지 6기 동인 가을페스티벌 ‘거짓말’의 세 번째 작품인 <쟨더트러블>이 그것이다. “남/여 성(性)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 우리가 만나기 위해 바꿔 나가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겠다는 이 연극은 젠더에 관한 무슨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어떤 생각할 지점들을 던져줄 것인가.

이분화의 재생산, 바뀌지 않은 젠더 인식

지하에 위치한 극장으로 입장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자, 극장 출입구 앞에서 어떤 이가 관객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남자면 이쪽(오른쪽), 나머지는 이쪽(왼쪽)” 연극이 만든 세계 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첫 관문이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화된 사회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듯한 태도에 연극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한다. 하지만 극장으로 들어간 후 기대감은 이내 사라진다. 입장하는 문만 다를 뿐, 이 둘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 양쪽 문으로 나뉜 것이 무색하게 각기 다른 문으로 들어온 관객들은 극장 안으로 진입하는 동안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하고 같은 무대를 맞이하게 된다.

관객이 마주한 무대는 마치 트랜스젠더 바(Bar)처럼 꾸며져 있다. 그 이름은 ‘트러블 클럽(Trouble Club).’ 무대는 바 테이블로 채워져 있고, 바 뒤에는 세 명의 여성 바텐더가 있으며, 바 앞에는 마치 분장을 한 듯 과한 화장을 한 다섯 명의 인물들이 저들끼리 웃고 떠들기도 하고, 들어오는 관객들을 향해 이런 저런 말을 건네기도 한다. 무대를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나뉜 객석은 일정한 형태로 배열된 전통적 객석의 모습이 아닌 제각기의 형태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관객은 원하는 자리에 자유롭게 착석할 수 있고, 공연 중간에 자리를 이동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객석 배열은 무대와 객석이 명확히 나뉘는 기존의 극장 관습에서 벗어나 마치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화된 사회의 경계와 구분을 없애자는 작품의 의도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객석들 간의 자유로운 배치만으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와 구분은 없어지지 않는다. 객석은 그 형태만 달리 했을 뿐 원래 객석이 있어야 할 위치에 그대로 자리하고, 무대는 무대로서 중앙에 존재한다. 관객이 객석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배우가 객석으로 다가와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해도 객석과 무대의 구분은 없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애매하게 허물어진 경계에 관객들은 불편함을 느낄 뿐이다.

앞서 묘사한 무대 역시 문제점을 지닌다.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선택한 무대는 트렌스젠더 바이고,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은 기괴한 화장을 한 채 과장되고 희화화된 모습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으로 이분화된 사회의 그릇된 젠더 인식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연극은 이성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LGBT의 유형화된 모습을 무대에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전도된 젠더 의식 없이 한국 사회에서 늘 봐왔던 기존의 젠더 인식 체계들을 그대로 무대에 형상화 한다. 이러한 무대와 인물들을 통해 과연 연극은 제대로 된 젠더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소통(疏通)이 아닌 불통(不通), 실패한 커뮤니케이션

공연이 시작되면, 한 배우가 노래를 시작한다. 트랜스젠더 바에서 종종 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다. 노래가 끝이 나자 무대 뒤에 위치한 벽면에 인터뷰 영상이 영사된다. 한 남성이 등장해 자신은 남성의 몸은 지녔지만,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제3의 성’을 가진 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소개 후 인터뷰 영상이 멈추자 노래를 불렀던 배우가 화면을 향해 질문한다. 그 질문에 맞춰 영상은 다시 플레이 되고, 영상 속 인물의 답변이 끝나면 배우는 다시 질문을 이어간다.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힘든 점은 없는지’, ‘기분 나빴던 일은 없는지’, ‘어떤 연애 생활을 했는지’, ‘성정체성을 찾는 다는 게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 여러 질문들이 오간다.

연극은 작품 창작 과정에서 공연 팀(극단 창세)이 인터뷰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품의 주된 서사로 삼는다. 인터뷰 영상이 그 중 하나다. 실제 성소수자를 인터뷰하여 그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얼핏 좋은 방법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한계를 지닌다. 연극이 보여주는 인터뷰 영상은 단 한 명의 인물에만 의존하며, 그와 나눈 이야기는 연극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논점이 아닌 이미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혹은 논의되고 있는 것보다 피상적인 수준을 맴돈다. 그 동안 인식되지 못했던 새로운 젠더 문제가 드러난다거나 기존에 논의된 문제를 심화시키는 등 깊이 있는 수준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그저 실제 성소수자를 인터뷰하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작품 창작 과정에서 공연 팀이 한 또 다른 인터뷰는 영상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인터뷰 영상이 끝나자 다섯 명의 배우는 관객에게 질문을 한다. ‘남성스러운 것과 여성스러운 것이 뭐라고 생각 하는가’, ‘여자를 수식하는 말과 남자를 수식하는 말은 무엇인가’, ‘퀴어 축제에서 기독교인이 하는 시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는가’, ‘다음 생에 같은 사람과 다시 결혼을 할 것인가’ 등 배우들은 관객 무작위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건넨다. 관객들은 배우들의 물음에 당황하면서도 고심 끝에 그만의 답변을 내놓는다. 이때 문제는 배우가 관객의 대답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우는 질문을 건네고, 관객의 답변을 들을 후, 관객의 답변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이미 준비한 다음 대사를 이어간다. 연극은 관객과 직접 대화하며 소통하는 듯하나 실상은 관객의 말을 철저히 배제한 채 불통(不通)의 태도를 유지한다. 연극에서 관객은 그저 배우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고, 배우가 요청한 공백에 공허한 메아리를 치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메아리가 된 관객의 대답 역시 무대에 가 닿지 못하고 휘발되어 버린다.

배우들이 준비한 질문과 대사 또한 앞선 인터뷰 영상과 마찬가지로 젠더 문제를 고취시키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무대 위 발화되는 질문과 배우들이 준비한 대답은 작품 창작 과정에서 공연 팀이 자신의 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의 내용들이다. 배우가 관객에게 건네는 질문은 공연 팀이 창작 과정 중 지인들에게 인터뷰 한 질문들이며, 배우가 내뱉는 대사는 당시 지인들에게 들었던 인터뷰의 대답들이다. 이때 인터뷰의 대상인 배우들의 지인들은 엄마 혹은 여자친구 등으로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젠더 문제를 심화시키기 위한 적절한 표본 집단에 해당하지 않는다. 연극은 현재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적 문제를 배우들의 ‘엄마’에게 질문하여 “나 때보다는 좋은 시절을 살고 있다. 나는 너희 아빠와 결혼한 걸 후회한다.”라는 허망한 대답을 듣는 것에 그치고, 여성과 남성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의 차이를 연인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피상적인 몇 가지의 의견 차로 무마해버리고 만다. 젠더에 대한 명확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해당 문제의식을 심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이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듣고, 이들이 사회 속에서 문제라 느끼는 공통된 지점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주변에 존재하는 한정된 집단의 얕은 경험으로 젠더 문제를 논하려 하니 무대에 쏟아진 질문들과 답변들은 관객과 맞닿지 못한 채 무대에 공허하게 부유하고 만다.

「젠더 트러블」이 되지 못한 <쟨더트러블>

연극의 제목인 <쟨더트러블>은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 「젠더 트러블」에서 인용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연극은 끝내 「젠더 트러블」이 되지 못했다. 「젠더 트러블」처럼 기존의 젠더 인식 체계를 비틀고, 새로운 전복을 시도하지 않을까 하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린 채, ‘젠더’의 그 어떤 ‘문제(트러블)’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쟨더트러블>에서 ‘쟨’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의 어떤 문제를 연극의 주제로 삼고 있는지, 그 문제를 가시화하여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등 아무런 방향성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실제 성소수자의 경험과 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성차별적 사례를 무대에 차례로 나열할 뿐, 그 어떤 문제의식도 심화시키지 못한 채 관객에게 아무런 생각할 거리도 제공하지 못했다. 연극은 컨셉으로 내밀었던 자유로운 클럽도 되지 못했고, 관객들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계쟁의 장소도 되지 못했고, 제3의 성을 가진 혹은 젠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은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론의 공간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는 젠더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해 없이 젠더를 그저 작품의 소재로써 사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연극은 시간과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질서 혹은 권력으로부터 구별되어온 소외된 자들,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에 집중하여 잊힌 ‘타자’들의 존재를 무대로 소환하고, 사회 저변 곳곳에 위치한 들리지 않던 다양한 목소리를 무대에 담아내어 현실의 단면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배우를 시대의 거울이라 말했다. 이는 곧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울로 비추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무대에 담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 왜 이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인지,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등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질문해야 한다.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공통의 문제로, 그리고 사회의 문제로 인식될 수 있도록 연극은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연극의 역할과 책임이고, 연극이 이 시대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사진 제공 – 극단 창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