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he 20th Century’

번뜩이는 글자들이 21세기의 관객들을 화려하게 맞이하는 가운데, 이상이 거두던 아이 수영의 ‘요-이, 하지메-‘ 구호가 끝나면 극이 시작된다. 시작과 동시에 쏟아지는 말의 홍수들. 반짝반짝한 눈으로 10여 분간 말재간을 뽐내는 20세기의 구보와 이상은 21세기의 관객들을 직전 세기의 다채로운 ‘말하기 쇼’로 끌고 간다.

연극 ’20세기 건담기’는 박태원, 이상, 김유정, 구본웅 등이 살았던 1936년과 37년의 경성을 그려낸다. 장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마이크’는 무대 위 20세기의 음성을 객석의 21세기 청중의 귀로 전파하는 매개체이자, 20세기의 건담가들이 발화로써 꼼꼼하게 채워나갈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도구였다. 마이크에는 배우들의 호흡, 음성, 기침, 백색소음 등이 20세기 식민지 조선을 구현하기 위하여 발화되었다. 21세기의 관객들은 실감 나게 묘사된 옛 서울 방언뿐 아니라, 흥겨운 악기 연주, 당시 시공간을 구현한 다양한 효과음을 배우들의 입을 통하여 들을 수 있다. 청각을 이용한 재현 방식은 독자 개개인이 생각하는 20세기의 경성을 마구 자극하는 재료가 된다.

푸짐한 ‘말하기 쇼’를 두 차례 관극한 후 필자는 이상의 ‘도일’과 ‘죽음’이라는 사건에 머릿속 한편을 내주어야 했다. 이상이 일본으로 도피하듯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양한 말하기 안에서 찾아가고, 이상의 죽어감과 일제의 파시즘은 얼마간의 간격을 남겨둔 채 평행한 철로를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이 글은 연재기한에 쫓기는 필자가 생각의 조각들을 급히 봉합한 흔적이다.

치질과 폐병, 그리고 낮은 천장

극은 김유정과 이상, 두 작가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다. 시종일관 유정과 이상의 신체는 불편했다. 특히 두 작가가 개인 서사를 펼쳐가는 토막에서는 더욱 그렇다. 치질을 앓아 앉아있기조차 고통스럽고, 폐병으로 기침이 멈추지 않아 말하거나 숨쉬기 또한 벅찼다. 더욱이 이들의 모놀로그는 무대 위 설치된 박스 안 혹은 위에서 진행된다. 이들은 낮은 천장 탓에 기립하려고 할 때마다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행동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신체적 제약과 장치들은 20세기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의 상황과 많이 닮아 있었다. 가시방석에 앉아 위아래로 피를 토했고, 호흡조차 어려워 기지개를 하고자 해도 허리를 개운히 펼 수 없었던 그들.

한편, 두 문인의 스캔들은 요란했다. 유정은 약혼자가 있는 여성을 짝사랑하며, 이상은 거친 풍파에도 변동림과 결실을 맺지만 끝내 불화를 겪는다. 이상은 유정을 찾아가 삶이 부질없다며 ‘더블 슈어사이드(double suicide)’를 제안하지만, 유정은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삶을 절망(切望)한다. 이후 이들은 각각 경기도 광주와 일본 동경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절망(切望)하던 이도 절망(絶望)하던 이도 모두 죽음으로 귀결된 20세기였다.

참담했던 시공간 속의 이상은 마냥 죽음만을 꿈꾸었을까? 1936년, 이상은 구인회 멤버들과 『시와 소설』을 창간하고 단편소설 「날개」,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를 집필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돌연 그는 같은 해 10월에 도일(渡日)한다. 자살은 관두고 그가 ‘그저 좀 살러’ 간다는 곳이 하필 ‘동경’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극은 그 이유를 명료히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상의 도일 동기를 정확히 알 수 없을뿐더러, 그 이유를 소상히 보여준다는 것이 설득력을 가지기 또한 어렵기 때문이다. 대신 성기웅은 극 말미 구보의 입을 통하여 그 이유를 자욱한 안개처럼 드러낸다.

1937년 1월, 새해를 맞아 구보와 구본웅은 두 대의 축음기를 이용하여 1936년을 회고하는 뉴스를 전한다. 2·26사건,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 공포,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손기정 선수가 일본 선수로 취급당하던 일, 일제의 대대적인 신문 탄압 등 비극적인 소식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마저도 한반도의 소식은 들을 수 없음에 한탄하던 와중이었다.

구본웅 : 지난 해를 돌아보는데 말야, 그른 생각이 들드군. 세계는 소란하였으나, 조선만큼은 고요하였다.

구보 : 조선만큼은 고요하였다? (사이) 아니, 우리가 모여서 그릏게 떠들어댔는데

‘외지’인들이 어느 이슈를 양산하든 그것은 뉴스가 될 수 없었다. ‘내지’ 기준에서는 바깥의, 보잘것없는, 무의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막연히 외지를 벗어나 내지로 향하고자 했던 것은 제국들의 뚜렷한 구분 논리가 만연한 이 국면을 어떻게든 전환해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이리저리 서 봐도 온전히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천장’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상의 죽음과 라쿠고

극은 다양한 ‘말하기’ 방식으로 이상의 삶을 서사화한다. 등장인물들은 만담, 모놀로그, 라디오 드라마, 변사쇼, 일본의 전통 예능 라쿠고(落語, 방석에 앉아 부채나 수건을 이용하여 일상다반사를 비롯하여 정치, 문학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학적·풍자적으로 들려주는 공연 형식) 등을 구사하며 ‘말’이 얼마나 다채롭게 구현될 수 있는 것인지, 하나의 서사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보여준다.

두 건담가의 만담으로 20세기로의 초대를 받은 관객들은, 이상을 비롯한 구인회가 발간한 『시와 소설』의 내용을 친돈야(ちんどん屋, 친돈북, 클라리넷 등을 울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선전·광고하는 사람)의 말하기 방식으로 전달받는다. 또한 ‘제비 다방’에서 일하던 아이 수영은 과거의 이상을 서툰 말솜씨로 회상하여 그려낸다. 이어 이상과 변동림의 로맨스는 라디오 드라마로, 이상이 꿈꾸던 미래상은 집단 건담으로 관객들에게 수신되었다.

개중 압권은 이상의 ‘라쿠고’이다. 성기웅은 그의 죽음을 스스로 묘사하게 했다. 도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었다가 옥고로 지병이 악화되고 결국에는 숨을 거두는 그 과정을, 이상은 ‘흥미롭게’ 이야기해야 했다. 주로 유머 중심의 회화를 이야기하는 ‘라쿠고’를 차용하여 스스로의 죽음을 묘사한다는, 이 아이러니하고도 가혹한 구성. 배우 안병식은 라쿠고가(落語家)와 죽음의 당사자를 동시에 연기해야 했고, 실제로 본인이 맡은 역할이 죽음에 다다르는 그 과정을 관객들에게 말장난을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전달했다. 그의 가벼운 익살 사이에서 20세기 건담가의 생애의 무게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이라는 기의는 어째서 라쿠고라는 기표와 연결되었을까. 사실 그 관계에는 필연성이 없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결합된 그 관계는 또 다른 필연화를 자아낸다. 철학 전공자이자, 라디오 연구가, 출판 및 인쇄업자, 요식업자, 작가였던 이상은 서울말, 일본어, 러시아어, 에스페란토어 등 다양한 언어로 글을 썼던 작자이다. 전체들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수용이 불가한 이 거추장스러운 개인. 그의 삶을 명확한 인과와 통념적 감정 구조에 기반한 보편적 어조로써 설명해내는 것은 그에게 대단한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극한의 가벼움으로 죽음까지도 익살로 무장할 수 있는 그의 말솜씨는, 그가 생전에 탄생시킨 작품들처럼 위트와 패러독스,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라쿠고는 작가가 건담가 이상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서사화할 수 있도록 달아준 ‘날개’이지는 않았을까.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