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무대 공간, 시끄러운 소음, 눈을 피로하게 하는 황색 조명. 공연 장소인 언더스탠드 에비뉴는 옆 사람 얼굴도 잘 보이지 않고, 제대로 된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조성되어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사가 들리기는 할까?’ 등 갖가지 우려의 마음이 들었지만 이 모든 걱정이 무색해질 만큼 관객을 사로잡는 연극 한 편을 만나게 되었다.

본래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관객들은 배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18세기 말 전문적인 연출가가 등장하고, 포스트모던의 물결 속에서 연극의 해체, 재구성의 작업이 이어지며 연극은 어느새 연출가의 예술이 되어버렸다. 안타깝게도 필자는 연출가의 예술이 된 연극을 보고 자랐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배우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던 적이 있던가. 그보다는 작품의 내용이나 연출의 기법에 중점을 두고 보지 않았던가. 대부분의 창작자들도 훌륭한 내용, 메시지 전달을 의도하고 만든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배우의 연기는 연출가나 작가의 의도를 훌륭하게 전달해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양손프로젝트의 <여직공>은 달랐다. 유진오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번 공연은 원작이 갖고 있는 의미가 결코 절대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편소설은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써 활용되었다. 그래서 공연을 본 후에는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아닌, 배우의 연기가 계속 머릿속에 맴 돌게 된다.

빈 공간을 채우는 배우의 움직임

공연의 원작인 유진오의 <여직공>은 1931년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일보에 열여섯 차례 연재하여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당시의 공장을 배경으로 주인공 옥순이 겪는 사건을 다룬다. 주요 배경이 공장이지만 공연은 텅 빈 공간에 몇 개의 의자 외에는 그 어떠한 무대장치도 없었다. 공장에서의 노동, 소음 그리고 다수의 등장인물들은 오직 배우 네 명의 신체만으로 구현한다.

시끄러운 소음이 잦아들면 배우들이 등장하고 공연을 시작한다. 적막 속에 처음 들리는 소리는 배우 손상규가 발화하는 소설의 문장들이다. 원작 <여직공>의 첫 장면에 묘사된 공장과 사건의 배경에 대한 문장들이다. 평면의 문장이 배우의 대사로 살아나 입체적으로 변한다.

곧이어 발레 음악에 맞춰서 한 명씩 차례로 발레 동작을 이어나간다. 무용의 움직임은 본격적으로 공장 여직공들의 노동을 보여준다. 꽤 오랫동안 진행되는 무용에 이어 누군가가 “작업 시―작”을 외치자, 발레 음악 소리는 차차 줄어든다. 무용수의 거친 숨소리는 노동하는 여직공의 숨소리로 일순간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극의 말미에도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간 후 처음의 발레음악에 맞춰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아름다운 몸짓으로 보이던 발레는 이제 여직공의 몸부림이 되었다. 이처럼 공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시작과 끝은 배우들의 발레 동작으로 구성된다.

<여직공>의 무대는 기본적으로 빈 무대이다. 의자와 최소한의 소품만을 배우가 지니고 있다. 네 명의 배우들 역시 모두 똑같은 여직공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같은 옷을 입은 배우들은 공장의 ‘김 감시’나 ‘공장장’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옷을 바꿔 입지는 않는다. 다만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을 벗으면 여직공에서 벗어나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같은 여직공일지라도 두건을 뒤집어쓰거나 안경을 걸치면 새로운 인물인 근주와 보배, 수많은 여직공들이 된다.

빈 무대에서 공장의 노동을 표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노동의 특정 움직임을 양식화하여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옥순의 “뽑고, 돌리고, 감고”, 보배의 “잡고, 펴고, 뜯고”는 여직공이 작업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대사와 움직임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사건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 옥순이 공장장에게 겁탈당할 때에도 사용된다. 사실적인 재현 없이도 공장장이 “넣고, 돌리고, 빼고”를 포악하게 외치면 관객은 겁탈 장면을 생동감 있게 보게 된다. 그 폭력적인 장면이 있은 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옥순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이유다.

여직공의 노동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대사가 일종의 ‘의태어’라면, 기적소리, 노크 소리, 차 소리, 신호등 소리 등의 ‘의성어’ 역시 배우들이 표현해낸다. 특히 옥순이 근주의 집에 방문하는 날, 집으로 가는 도중 만난 도로의 시끄러운 잡음은 인위적인 음향소리 없이 오직 배우들의 음성을 통해 전달된다. 점심시간의 식사하는 모습도 배우들이 무대 위에 우뚝 서서 안면을 이용해 게걸스럽게 먹는 표정을 짓고 쩝쩝대는 소리를 내어 표현한다. 가상의 식기도구를 들고 행하는 ‘사실주의 연기’ 보다 더 생생하다.

<여직공>에서 배우들은 사실주의 연기만을 하지 않으며 곳곳에 양식화된 연기를 뒤섞는다. 한정된 배우들은 한정된 소품으로 여러 배역을 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그런데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 어떠한 연기보다 더 잘 전달되고, ‘사실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들의 연기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배우도 관객도 무대의 공간이 ‘허구’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들의 작업에서 ‘연극성’은 극대화되는데, 대체 이 연극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삼인칭 발화를 통한 거리두기

원작 소설의 서술자는 작가의 관점으로 설정됐다. 그리고 평면적이다. 등장인물은 오직 작가의 ‘묘사’로 표현된다. 반면 무대화된 연극에서 등장인물은 배우의 ‘재현’에 의해 구현된다. 양손프로젝트의 <여직공>에서 배우는 작가의 묘사를 ‘발화하는 서술자’와 등장인물을 ‘재현하는 배우’라는 두 가지의 층위가 함께 공존하며 더욱 풍성하게 한다. 예컨대 옥순이 몇몇 장면에서 상황을 ‘재현’하면, 옆에서의 서술자는 옥순의 감정을 ‘서술’해준다. 이때 관객은 주인공 옥순의 상태와 감정을 더욱 빠르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직공>의 작업은 실험적인 희곡을 썼던 중국의 예술가 가오싱젠의 연극이론과 맞닿아 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연기 방법론인 ‘각색(脚色)’ 제도를 통해 ‘연기의 삼중성’이라는 중요한 연극이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각색이란, 경극에서의 ‘생(生), 단(旦), 정(淨), 축(丑)’과 같은 유형화된 배역을 말한다. 서양의 연기예술론이 ‘배우―역할’이라는 두 층위로 되어있다면,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의 전통적인 연기예술은 바로 ‘배우―연기의 방식―역할’이라는 세 층위로 구성된다.

예컨대 ‘단(旦)’이라는 각색은 젊은 여성을 연기하는 방법론이다. 따라서 ‘단’의 연기법을 훈련한 배우는 <인형의 집>의 노라도, <햄릿>의 오필리어도 연기할 수 있다. 이때 ‘단’을 훈련할 수 있는 배우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퀴어이든 상관없다. 이것을 각색제도라고 한다.

가오싱젠이 발전시킨 ‘연기의 삼중성’이란 이론이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배우가 있고―연기의 방법이 존재하고―종국에는 특정 역할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중간의 단계를 가오싱젠은 ‘배우의 중성적인 상태’라고 했다. 이는 배우들이 여성과 남성과 여타의 구분이 모두 사라진, 그 어떠한 것도 표현할 수 있는 상태이다. 양손프로젝트가 한정된 배우로 암전도 퇴장도 없이 자유로이 여러 역할을 넘나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우 손상규가 포악한 일본 공장장에서 옆 공장의 김경옥과 옥순을 찾아오는 또 다른 여직공 순임으로 자유로이 변화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중성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근주의 집에 모여 ‘우리는 왜 가난해야 하는가’라는 책을 함께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방에는 근주 남편(허지원 분), 옆 공장의 김경옥(손상규 분), 순례(양종욱 분)가 있다. 무대 위 네 명의 배우가 이미 하나씩 배역을 맡은 상황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과연 누가 어떻게 새로운 인물을 맡게 될까. 배우들은 모두 관객을 등지고 가상의 문을 향해 돌아선다. “누구세요?” 잠시 후 등진 배우 양종욱이 안경을 쓰고 돌아선다. “나 보배야.” 순식간에 순례가 보배로 바뀌었다. 이처럼 관객들은 배우가 완전히 이질적인 등장인물을 구현함에 있어 역할 간 ‘사이’의 공간을 느끼고 순간 일소를 하게 된다. ‘공장장이 여직공이 됐어?’, ‘순례가 보배가 됐네?’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곧 배우와 관객 모두 변화된 등장인물에게 금세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연극이 단지 가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역할을 바꿀 때, 암전을 시도하거나 퇴장을 한다면 관객이 이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래서 양손프로젝트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다역(多役)’이라거나 혹은 한때 유행했던 ‘멀티맨’이라는 용어가 부적합하다. 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자유로이 여러 역할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이미 어떠한 역할도 수행할 수 있는 중성적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고, 배우와 역할 사이의 공간에서 제약 없이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오싱젠이 ‘연기의 삼중성’을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삼인칭 발화’이다. 양손프로젝트가 ‘연극성’을 구현하기 위해 선택한 재료가 단편소설인데, 놀랍게도 이는 ‘삼인칭 발화’를 수행하게 해준다. 공장장에게 겁탈을 당한 옥순이 공장에 나가지 않은 날, 기숙사에 살던 보배는 여직공들이 보는 앞에서 두드려 맞고 끌려갔다. 다음날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공장에 출근한 옥순이 다른 여직공에게 보배의 행방을 묻자 그때서야 보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옥순은 내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는다. 갈등하는 옥순 역의 김주희는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발화한다. 이때의 대사가 바로 삼인칭이다. 삼인칭 발화로 하여금 옥순이 옥순에게 하는 죄책감의 말은 객관성을 띠게 된다.

가오싱젠은 연극이 어른들의 놀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른을 보고 흉내 내는 것처럼, 연극도 일상을 흉내 내는 일종의 놀이인 것이다. 그래서 연극을 행하는 예술가나 관객은 모두 연극이 허구임을 인지하고 있다. 굳이 연기를 사실적으로, 재현적으로 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어쩐지 양손프로젝트 작업의 지향점과 가오싱젠의 이론이 닮아 있다. 왜 일까? 필자는 이들의 작업에서 연극을 배우의 예술로 간주했던 전통적 연극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사진 제공-양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