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이 들었다. 관객의 총체적 경험을 분석하겠답시고, 나는 내 신체의 한계에 갇혀 비장애인 관객인 나를 기준으로 장애인 관객을 배제한 접근을 해오고 있었던 건 아닌지. 사유와 감각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지만, 비평의 이름을 내걸었다면 더 이상 사적인 차원에 안주해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신체를 공적인 영역에 놓고, 그것이 처한 다양한 입장을 논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내가 속한 계층 집단까지도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화되는 과정을 피해갈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외와 착취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0set이 <연극의 3요소>와 <불편한 입장들>에서 보여준 신중한 태도는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만 지나친 조심스러움이 담론이 한층 나아갈 여지를 막아버리지는 않았나 하는 의문도 든다.

시작. 극장 공간으로부터

<연극의 3요소>와 <불편한 입장들>은 각각 ‘극장 돌아보기’와 ‘극장 다시 보기’에서 출발한다. 관객은 공연 관람의 목적을 갖고 극장으로 향하는 경로부터 극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여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것까지 모든 여정을 복기하고, 그 여정에서 (비장애인의 신체를 가진 입장에서) 간과해온 다양한 물리적 요소들을 살펴보고 재발견하기를 요구받는다.

<연극의 3요소>에서 관객은 입장하면서 받은 설문지에 자신의 평소 관람 형태와 극장 안과 밖을 오가며 겪었던 경험 내지는 불편함을 써 내려간다. 머리 위로는 흰 실이 무수히 쳐져 있어 관객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실들을 건드리지 않으려 이를 피해 벽에 붙어 앉거나 고개를 숙이고 건너편으로 지나간다. 마치 극장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 혹은 행동 제약들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설문지를 모두 작성하고 나면 가벽이 열리며 따닥따닥 붙어 앉아야만 했던 다소 좁았던 공간이 본래의 모습으로 확장된다. 평소 장애인활동보조인교육이 이루어지는 노들장애인야학 대강당에 연극이라는 비일상적 사건을 공간의 맥락에 맞게 발생시키기 위해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시도가 눈에 띄었다. 장애에 관한 담론과 사유가 수없이 이루어지는 곳임에도, 극장이라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 개입되면서 이 공간 역시 연극적 전환을 겪어야 했다.

<불편한 입장들>에서는 공연 전 ‘시설 접근성 워크숍’을 통해 관객들이 직접 남산예술센터의 물리적 시설과 환경을 모니터링 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들은 한 손에는 줄자를 쥔 채 매표소와 주차장 등 외부 공간에서 공연장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와 진입로를 지나 화장실을 먼저 확인하고 분장실이 있는 백스테이지 공간들을 거쳐 원형 극장 내부로 들어가 체크리스트의 사항들을 꼼꼼히 점검한다. (시각․청각․지체) 장애인 관객의 접근성 측면에서 관객이 재고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워크숍 이후 진행된 본 공연은 반원형 극장 중앙무대(리프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무대 중앙은 지체장애를 가진 배우가 휠체어에 탄 채로는 비장애인 배우와 같이 백스테이지를 거치는 경로로는 접근하지 못하는 공간이다. 리프트 등의 이용을 제외하고 혼자 오롯이 백스테이지에서 무대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닌, 활동보조인이나 극장 측 어셔의 물리적 도움으로 이루어진 ‘입장(entrance)’이 전제되는 것이다.

<불편한 입장들>은 접근성이라는 키워드에 치우쳐 극장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나아가 정해진 공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가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중앙무대를 과감히 벗어나 극장 내‧외부에 다른 퍼포먼스 공간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운치 못한 타협처럼 느껴졌다. 노들장애인야학 대강당은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베뉴(venue)가 아니었기에 연극을 위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공간을 연극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대안적이고 탈극장적인 방식으로 잘 풀어낸 것으로 보였다.

전개. 배우가 중심이 되어

<연극의 3요소>와 <불편한 입장들>은 성수연, 문영민 두 배우가 주축이 되어 이끌어나간다. 무대 공간에서 배우들은 서로에게 있어 번갈아가며 주체이자 대상이 된다. 사전 워크숍의 모니터링이 시각‧청각‧지체 장애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의 연장으로서 공연의 배리어프리(barrier-free) 장치 역시 시각‧청각‧지체 장애인의 공연 관람 편의에 맞춰져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속기사가 실시간으로 입력하는 배우의 말들이 상단의 스크린에 프로젝션 된다(문자통역). 이뿐만이 아니다. 영민이 동작을 수행하면 수연이 영민의 지문과 대사를 읽는다. 수연이 동작을 수행하면 영민이 수연의 지문과 대사를 읽는다. 다시 말해 퍼포먼스 공간에서 벌어지는 행위와 동선까지 배우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화면해설).

이 과정에서 두 배우는 서로의 몸을 읽어나간다.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사소한 옷매무새 하나까지 면밀히 묘사한다. 서로 다른 신체를 가진 두 배우는 끊임없는 신체 접촉을 통해 무대 공간에서 둘만의 관계를 쌓아나간다. 공연 중 언급된 친구의 조건—연대감, 공감, 정서적 유대, 역지사지—네 가지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관찰과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배우들의 신체 위로 오버랩 되는 텍스트들은 사뭇 아이러니하다. 가령 ‘걷는다’라는 묘사가 있을 때, 같은 표현일지라도 휠체어를 이용하는 문영민 배우의 걷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성수연 배우의 걷는 행위는 다른 방식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휠체어 역시 문영민 배우의 신체 일부처럼 움직이고 성수연 배우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한다.

<연극의 3요소>에서는 사적 차원의 교감을 보여줬다면 <불편한 입장들>에서는 두 배우가 하나의 드라마를 이끌어나가기에 이른다. 연극 속의 연극,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 <하녀들>이었다. <하녀들>의 희곡을 읽던 문영민 배우와 성수연 배우는 책을 던져버리고 그대로 끌레르와 솔랑주가 된다. 대사나 지문을 눈에 띄게 변주하지도 않고 그 밖에 무대 세트나 오브제도 없이, 장 주네의 <하녀들>은 오롯이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완성된다. 무대 공간에는 오로지 두 배우의 신체와 <하녀들>의 텍스트만이 존재하며, 여성(으로 패싱되는) 신체를 가진 동시에 각기 장애인/비장애인인 두 배우의 신체는 끌레르와 솔랑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는 나아가 결국 계급과 억압의 문제로 점철된다.

확장. 관객에게로, 극장 밖으로

<연극의 3요소>와 <불편한 입장들>의 후반부는 각기 다르게 구성되었다. <연극의 3요소>의 경우 3막에서 1막에서 작성한 설문지를 바탕으로 관객들의 극장 경험을 다 같이 공유하는데, 관객은 이때부터 ‘참여자’로 명시된다. 공연이 모두 끝난 후 0set의 제작진들은 관객들에게 국가인권위원회를 대상으로 공동진정을 제안했으며 대부분의 관객들이 진정서에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불편한 입장들>에서는 시설 접근성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작성한 체크리스트 및 시설 점검 보완 사항을 건축 전문가가 소프트웨어 툴을 이용해 스크린에 직접 구현했으며, 관객들이 현장에서 제안하는 아이디어를 실시간으로 반영함으로써 보다 구체성이 더해진 공론의 장이 형성됐다.

이 중 장애의 층위가 한정적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의견은 시설 워크숍 때부터 꾸준히 나왔었고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실제로 하나의 작품에서 다룰 수 있는 장애의 층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나, 공공극장에 올라야 하는 숙명을 지닌 작품이 최소한으로 다뤄야 하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고민은 여전히 들 수밖에 없다. 비록 ‘기성 극장들은 비장애인의 입장(entrance/stance)을 기준으로 설계되었다.’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보다 넓은 담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확장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불편한 입장들>에서는 ‘극장 시설’이라는 물리적 환경에 지나치게 매몰되었던 탓인지는 몰라도, 장애의 분류가 다양한 만큼 제약의 층위도 다양하다는 점이 간과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공연장 에티켓’ 혹은 ‘관람객 이용수칙’이라는 미명 하에, 혹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생활권이 철저히 분리되어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소외되는 경우는 또 다른 문제다.

장애(인)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제도적/물리적/인식적 요인에 의해 소외와 분리가 야기되기도 한다. 그저 불편함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에서 다만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이면 적응해 살아나갈 수 있는 인프라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0set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면, 이는 비단 장애(인)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을 논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성수연 배우는 3막에서 진행된 관객과의 대담에서 “사람들이 이 연극을 장애연극으로 볼까요?”라고 말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장애연극으로 규정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장애연극’으로 라벨링 되는 데에 부정적인 시각이나 우려는 갖고 있지 않다. 동시대성의 반영은 연극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갖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연극은 그것을 행하는 주체와 유리될 수 없고, 삶과도 사회와도 유리될 수 없기에 <연극의 3요소>와 <불편한 입장들>이 지니는 가치는 유의미하다. ‘여성연극’이라는 말이 유효한 것처럼 ‘장애연극’도 마찬가지다. 소수자 담론에서 비롯된 프레이밍은 외려 오픈플랫폼처럼 확장적이고 수용적으로 보다 많은 작품들에 적용돼야 한다고 본다. 반면 연극이 수단이냐 목적이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주체와 공간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다시 작품에 투영함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충분히 좋은 공연이라 할 만하다.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지점들 역시 대부분 두 작품을 보지 않았더라면 생각조차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조심스러움을 걷어내고 조금 더 첨예하게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작품의 톤과 연출의 화법 역시 존중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관객을 조금 더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이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당신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이고, 당신의 해방이 곧 나의 해방”이 될 때까지, 어떤 베뉴에서든 관객으로서 0set을 계속 만나며 극장 밖으로 확장된 이 연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사진 제공 – 신재 연출, 남산예술센터, 0set 페이스북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