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빗소리, 지독한 여름이었다. 왜 이리 비가 많이 오는지.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답답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 없는 방에선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며 칭얼대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한반도는 한평생 에어컨 없는 땅이더라. 작품 속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피터 현(1906~1993)에게는 말이다.

한 사람, 무대에 오르다

과거를 건너 온 자들에게는 역사를 기록해야 할 임무가 있다. 역사를 모르는 세대에게 일단 알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왕이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게 좋겠다. 역사를 재구성하는 다양한(시쳇말로 신박한)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다.

최근 한 인물을 꺼내어 역사를 통시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여름,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박열>과 <택시운전사>가 스크린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조선 청년 박열과 택시운전사 만섭은 비통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한 사람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연극에서도 지난 과거를 무대로 소환하는 작업이 무던히 이어지고 있다.

연극 <에어콘 없는 방>은 제6회 벽산희곡상 당선작이다. 선정 당시의 제목은 <유신호텔 503호>이었다. 유신체제가 노골적으로 떠오르는 작품명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을 보면 금세 답을 찾는다. 역사적 기록에서 비껴선 개인의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피터 현. 누구는 모르던 사람이고, 누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주인공 피터 현보다 그의 아버지 현순 목사와 그의 누나 앨리스 현이 더 익숙하다. 정동교회 목사였던 현순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고, 박헌영과의 친분으로 북한에 머물던 앨리스 현은 남로당 숙청 당시 간첩 혐의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극작가 고영범은 “제정신으로 살려고 물을 건넌 이들을 들여다보다”가 피터 현을 만났다고 밝혔다. 실존 인물을 무대화하는 작업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따른다. 게다가 근현대사의 풍파를 고스란히 새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첫 무대화하는 작업에는 더욱 그러하다.

때는 1975년 무더운 8월. 칠순의 피터는 부모님의 국립묘지 안장이 확정돼 귀국했다. 그런데 무언가 불안해 보인다. 긴 시간동안 공산주의 활동 혐의로 고생을 해왔기에, 반공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한국의 현 상황이 괴로울 만하다. 창문을 열지만, 거리의 소음이 모람모람 공격해 온다.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다시 닫는다. 꽉 막힌 공간. 그에게 조국은 그런 곳이다. 잠시도 마음을 열 수 없게 만드는 곳. 웅크려 앉아서 쐬는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그는 충분해 보였다. 28년 6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건만, 한국은 여전히 그대로다. 지독하다.

이성열이 연출을 맡았다. 고영범과 이성열은 대학 시절부터 친구이며, 2007년 <오레스테스>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 작품은 무대 설정이 매우 긴요하다. 현실과 비현실의 혼합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불안증에 시달리는 70세의 피터는 젊은 날의 자신이 자꾸 보인다. 피터의 몽롱한 정신이 빠르게 돌아올 수 있도록 무대는 사실적으로 구현됐다.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의 개방적인 극장 구조가 폐쇄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닫힌 공간을 만들기 위해 반원 형태의 돌출 무대에 벽을 설치한 것이다. 열렸다 닫혔다 하는 이 벽은 피터의 심리 상태와도 맞닿아 있다. 연출가의 고민이 여실히 느껴지는 지점이다.

다시 발견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재구성하는 것은 위험을 안고 있다. 개인으로서 피터 현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고, 무슨 고통을 느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흘러가는 대로 두고, 피터의 사정에 집중한다. 극 속에는 1930년대 세계대공황,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 선풍과 6·25 전쟁 휴전, 1970년대 유신정권까지 다양한 시공간이 뒤얽히고 중첩된다. 혼란스러운 여정 속에 극을 관통하는 건 한 개인의 분열된 정체성이다.

칠순의 피터는 서른의 피터와 조우한다. 미국에서 아동극 연출자로 일하던 시절의 자신이다. 약과 알코올에 의존하는 지금과는 확연히 다르다. 당차다. 자신을 ‘찹수이(chop suey)’라 비꼬는 배우들에게 “난 조선인이요. 뼛속까지 아일랜드 사람인 당신을 영국사람 취급하면 기분이 어떻겠소?”하며 맞받아친다. “1936년의 뉴욕에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뉴스”라며 자조하기도 한다. 피터는 위협을 느낄수록 가시를 세운다. 그는 옳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를 지켜야 한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뿐. 그림책 <황소 페르디난드>를 각색한 인형극을 성공적으로 연출하고, 이어서 <비버들의 봉기>의 연출을 맡는다. 이 작품도 반응이 좋아서 브로드웨이 상연이 결정된다. 하지만 배우들은 브로드웨이에 동양인 연출가와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소리친다. 결국 배우들은 다른 연출가와 브로드웨이에 가지만, 대부분은 그 후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피터의 말처럼 “그래봐야 한 편의 연극”이었다.

참고 참았던 앨리스 현의 울분은 귓가에 선명히 남아있다. 그녀는 뉴욕에서 대학 다닐 때 세탁부 취급을 받았던 자신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북조선에서 치열하게 일했던 자신을, 미국여자들보다 더한 걸 성취할 수 있다고, 우리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기대하며 지내던 시절을 회고한다.

허허로운 역사의 현장에서 개인이 바란 건 하나였다. 누구도 누구를 섬기지 않길. 연극을 보다보면 누구는 인종차별을, 누구는 자본주의를, 누구는 페미니즘을 읽을 것이다. “누구도 서로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이 만든 것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누구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이는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의 명제로 귀결된다. 인간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역사의 이면에 담긴 개인의 진실에 주목했다. 한 인간을 에어컨이 없는 퀴퀴한 방으로 몰아넣는 유령은 무엇인가? 무엇이 피터 현의 인생을 이리도 옭아매는가?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역사적 세력과의 긴밀한 연관성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피터 현의 이야기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날이 더워지고 있는데, 에어컨 없는 방에 갇힌 자들을 속히 구해내야 한다.

(사진 제공 –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