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상 자체요. 그리고 상상 안에 영원히 머물 겁니다.”

M. Butterfly 르네

 

상상(想像), 말 그대로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무언가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일이다. 그 내용은 사람이 다양한 만큼 무궁무진하지만 그 끝은 대부분 크게 두 개의 방향으로 수렴된다. 누군가는 상상을 넘어 현실에서 그 결실을 맺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끝에 도사리던 허상을 마주하곤 패배감에 휩싸인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은 아닌, 이만큼 달콤하면서도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늘 상상과 함께한다. 알려주는 이 하나 없어도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꿈꾸고 그려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를 이 능력을 얼마나, 어떻게 사용할지 또한 각자의 몫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란 거대한 포부부터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자책까지 그 폭과 깊이는 실로 엄청나니까.

당신이 했던 상상 중 가장 달콤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패배감에 휩싸이게 했던 것은 또 무엇인가. 여기 달콤하면서도 처절한 상상에 빠져 현실마저 뒤틀려버린 한 사내가 있다. 연극 속 ‘르네’가 그 주인공이다.

연극 는 2012년 프랑스 외교관과 중국 배우, 두 남성의 기묘하고 강렬한 드라마를 김광보 연출 특유의 분위기로 다듬어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이후 2014년 재연, 2015년 삼연을 거치며 ‘연극열전’의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삼연 공연은 초‧재연 배우들이 모두 재출연해 연극 마니아층에서 ‘삼연의 기적’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삼연의 기적은 그동안 작품을 사랑해준 관객에 대한 이별선물이었는지, 이번 2017년 공연은 연출, 배우진 모두 완전히 바뀌었다.

처절한 사랑인가, 뒤틀린 망상인가

르네와 송의 러브스토리는 성별을 뛰어넘는 세기의 비극적 사랑이자, 서양남성의 우월의식과 동양여자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낸 기묘한 사랑으로 세간에 회자됨과 동시에 비난받아 왔다. 어느 관점으로 이 둘을 볼 지는 철저히 관객의 자유다. 연극은 이 둘의 사랑이 세상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 포장하지도, 르네의 환상을 지저분한 스캔들로 폄하하지도 않는다.

극 초반 르네는 지극히 평범한 사내다. 중국이란 낯선 곳에서 매일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친구의 유혹(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예쁜 여자들과 놀 수 있는 밤이 준비되어 있다는 식의)도 모두 거절하며 자신감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가련하고 희생적인 버터플라이를 연기하는 ‘송’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잘난 점 하나 없는 남자인데다가 심지어 아내조차도 자신의 지위를 높여줄 ‘본인보다 나은’ 여자로 골랐던 탓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우월감을 송을 통해 느끼게 된 것이다. 때문에 송만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준다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르네의 행동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송의 집에 처음 찾아갔던 날, 송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목소리와 동작이 커지고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향한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곤 수치스럽다는 송을 보며 굉장한 정복감을 느끼고 만족스러워 한다. 르네의 이런 태도가 극대화되는 장면은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상사에게서 느낀 굴욕감을 풀 대상으로 송을 선택하는 장면이다. 철저히 남성으로서의 우월감과 정복감을 느끼기 위해 그는 송에게 나체를 보여달라고 한다. 그는 거부하는 송에게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다 받아주며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애써 사랑으로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려 하지만 관객의 눈엔 오만 혹은 독선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연극은 르네가 가지고 있는 서양인으로서의 우월감과 동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오히려 동양 여자는 입은 ‘No’라고 하지만 눈은 ‘Yes’라고 말하고 있다며 르네가 백인 남자로서 가지고 있는 동양, 특히 동양 여성에 대한 우월의식을 지속적으로 짚어준다.

한편 르네 눈에는 한없이 순종적인 송은 참 묘한 존재다. 서양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할 만큼 진취적인 여성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집에 르네를 들이자 남들의 눈이 무서워 방으로 숨어버리고 만다. 르네의 말을 빌리자면 서양인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도 르네의 서양-동양 이분법적 사고가 잘 드러난다.) 그렇게 르네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손을 잡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던 송은 극이 진행되면서 르네의 우월감을 이용해 더 멋있는 모습을 보여달라며 기밀정보를 알려달라고 조르는 등 이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르네의 우월감과 도취감을 부추기는 송의 이러한 모습은 본인의 버터플라이 연기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본인의 정체가 들킬 뻔한 순간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 것을 그 무엇보다 예술적이었다며 자아도취에 빠지는 장면이 그 느낌을 한층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부정하는 르네를 바라보는 송은 사랑에 거부당한 사람이라기보다 본인의 연기에 결함이 생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배우’로서의 모습이 짙다.

극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송이 여자에서 남자로 환복하는 장면이다. 내내 무대 위에 있던 르네를 굳이 쫓아내고 송이 무대 위에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은 상당한 긴장감을 준다. 가림막 뒤 분주하게 움직이는 배우와 스태프, 빠른 속도의 음악은 자칫 극의 여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장면을 오히려 몰입하게 만든다. 조명이 밝혀지고 남자인 송이 입을 떼는 순간, 이 장면을 위해 여태껏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고조에 달했던 긴장은 송을 마주한 르네의 처절함과 함께 와르르 무너진다. 자신의 완벽한 사랑이었던 버터플라이가 사라졌다는 상실감과 완벽히 연기해낸 버터플라이를 부정당한데서 오는 분노가 부딪히면서 빚어내는 하모니는 참으로 처절하다.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어느 순간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버리거나 부정당했을 때 느끼는 허무함, 슬픔, 분노 등을 감히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상상의 끝자락에 서 있는 그대에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삻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

 

르네는 자신이 꿈꾸던 미래가 본인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현실과의 괴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 과정이 매우 극적이고 흔하지 않을 뿐, 사실 상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좌절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르네를 단순히 환상에 빠져 인생을 망친 놈이라 손가락질 하는 대신 동정할 이유이다. 우월감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차면서도 그가 겪었을 고통과 상실감에 마음 아픈 아이러니함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푸시킨의 시가 떠오른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달려왔던 길 끝에 빛나는 결실 대신 허상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기를 바라며, 혹시나 ‘버터플라이’의 본모습을 봐버린 이들에게 르네의 이야기를 전하며 감히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사진 제공 – 연극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