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가부키 공연은 고대 인도의 신화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전기라고 한다. 안내서를 받아 읽어보면서 그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일본에서 수 세기 동안 사랑받았던 고전 문학 ‘겐지 이야기’를 기대하고 왔건만, 인도의 설화를 가부키에서 공연한다니. 이 공연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전통 예능 가부키에서 일본 고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도 고전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큰 거부감이 들었던 나는 혹시 이 공연이 가부키 형식조차 변형하여 상연되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마저 들었다. 외국인인 나는 일본에 온 김에 일본 전통 공연을 보고 싶었던 거였으니까. 인도 설화를 이야기하는 가부키는 어떨까. 외국의 고전 신화를 자신들의 전통 방식으로 상연하기로 한 가부키 프로덕션. 과연 전통 공연으로서의 의미가 있을까?

걱정한 게 민망할 정도로 공연은 굉장히 재밌었다. 몇 년 전 처음 본 가부키 공연보다도 훨씬 더 많이 말이다. 당시 공연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내용으로, 전통적인 가부키 레퍼토리를 가지고서 상연하였다. 그래서 이번 공연 때에는 ‘정통 가부키’의 매력과 ‘일본의 고전’을 느끼지 못했는가, 하고 본다면 딱히 그것도 아니었다. 마하바라타 전기는 가부키 공연이 늘 올렸던 공연 내용과 꽤 비슷했다. 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과 연인들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 같은 부분들 말이다. 처음 본 가부키의 내용은 남자 주인공의 비천한 출신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적인 삶과 사랑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다. 마하바라타 전기는 부모인 신들에게 버려진 주인공 카르나의 비극적인 운명과 애절한 사랑 이야기, 인간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리려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가부키 공연으로서 딱이지 않은가? 물론 상식대로 생각하면 그럼에도 일본 전통 공연에 인도 설화를 가지고 온다는 걸 상상할 수 없지만 말이다.

가부키에서 추구한 내용과 비슷하다는 것 말고도 이 공연의 장점은 따로 있다. 외국인인 내가 한국어로 쉽게 마하바라타 전기의 내용을 미리 찾아본 후 공연 관람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하바라타 전기는 그리스의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와 같이 유명한 인도 신화이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처음 본 가부키 공연은 어디서 그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워 일본어를, 그것도 고대 일본어를 잘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반면, 이번에 본 마하바라타 전기는 일본어를 자세히 알지 못해도 내용을 미리 알고서 가부키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나와 같은 외국인들에겐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 당최 무슨 대사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주인공의 기모노만 구경하고 오지 않아도 됐다. 유명한 외국의 고전 설화를 가져와 가부키로 공연한다는 것. 처음엔 신기했지만 점차 현명하게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가부키 양식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 신화에 대해서 공연하지만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이건 가부키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가부키 프로덕션은 이번에 마하바라타 전기를 제작하여 처음으로 선보였다. 제작하면서 반드시 고수해야만 하는 연기 방식과 행동 양식, 의상과 분장, 인물의 성격 등을 잘 지켜낸 듯 보였다. 공연은 어디까지나 내용만 인도 설화였을 뿐 일본의 ‘오래된’ 예능, 가부키였다. 반드시 일본 고전 문학 ‘겐지 이야기’만을 올려야 가부키일까? 하나미치에서 등장하는 인도 시바 신을 보면 그것만이 가부키는 아닌 것 같다. 하나미치는 가부키 무대의 특징 중 하나로 무대 하수에서 객석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그 공간은 평범하지 않은 세계의 인물을 연기할 때 사용하는 곳으로 주로 도깨비, 신 등의 영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그러니 인도의 시바 신도 출현도 가능한 것이다.

외국인인 나에겐 적합한 공연이었다고 치자. 자국민에게는 어땠을까? 전통 공연이 훼손된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까? 일본인들 입장에선 외국인이 일본 정서가 깃든 문학을 알고 가는 것이 더 좋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그들의 생각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일본인들도, 외국인인 나도 화려한 기모노를 차려입고 새하얀 가부키 분장을 한 아름다운 인도 공주가 인도코끼리를 타고 등장하는 장면이나 회전무대를 통해 바뀐 무대 위가 인도의 갠지스 강으로 변하는 걸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부키 프로덕션이 계속해서 똑같은 일본 고전 이야기로 공연을 올렸다면 가부키를 몇 번 본 자국민은 더는 공연을 보러 긴자의 가부키좌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가부키 프로덕션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관객층을 자국민으로도 두고 있는 것이다.

마하바라타 전기를 가부키로 상연하는 것은 여러모로 현명했다. 초자연적 존재인 신들이 등장하고 선, 악이 뚜렷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인물끼리 대결을 하며 승리를 쟁취하기도 한다. 가부키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모두 등장하는 것이다. 운명, 전쟁, 사랑, 신분 차이, 상황에 좌절하거나 극복하는 서사 등. 가부키 프로덕션은 마하바라타 전기에서 일본의 감수성과 겹치는 부분들을 찾아내 적합성을 판단하여 공연을 제작하였다. 인도 설화에서 가부키로 구현해낼 수 있는 여지를 본 것이다. 물론 묘하게 이질감이 드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판소리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상상해보라. “그때 제우스 신이 말허는디!(얼쑤!)”. 무대 위에 기모노를 입은 이들이 모두 고대 일본어를 사용하고, 오래된 일본 가옥에서 등장하는데 알고 보면 사실 인도 태생의 인물들이다. 이런 장면이 익숙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이 낯선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둔다. 억지로 끼어 맞추려 들지 않아 좋다. 가부키지만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있고, 기모노를 입고 있지만 배경엔 갠지스강이 등장하고 있다는 걸 무대 위에서도, 관객들도 모두 인지하고 있고 드러내고 있다. 이는 꽤나 이색적이고 실제로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공연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전통은 전통 방식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완전히 깨트렸다. 일본 고전 소설 겐지 이야기만 가부키로 올릴 수 있다는 나의 편견이 부서진 것이다. 나는 현대의 가부키를 보고 있었다. 옛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서만 만들 수 있는 오늘의 가부키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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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다양한 이유로 존폐위기에 처해있다. 오랫동안 이어온 문화가 사라질까 두려운 건 비단 우리 이야기만도, 남의 이야기만도 아닐 것이다. 가부키는 자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 전통 예능은 아니기 때문에 가부키 프로덕션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언젠가 가부키를 찾는 이가 끊기고, 대를 잇는 배우들도 사라질까 염려하는 것이다. 1980년대 ‘수퍼 가부키’가 나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제까지 고수해온 전통적인 서사 방식 대신에 좀 더 빠르고 스펙타클한 전개로 만들어져 현대에 맞는 가부키 형식을 창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수퍼 가부키’ 장르이다. ‘수퍼 가부키’에서는 일본 만화 원피스(오다 에이치로 작)를 가부키로 제작하였다. 몇 해 전 초연을 했고 이번에 재연을 한다. 나에겐 마하바라타 전기도 파격적인 행보였는데, 만화 ‘원피스’를 가부키로 한다니. 이보다도 현대에 발맞춰 제대로 적응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부키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지만 더 이상 옛날을 살아가지 않는다. 현재를 살면서 현존하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발맞춰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프로덕션은 어떤 관객을 타깃으로 삼을지 재탐색하고 그들을 위해 어떤 레퍼토리를 내놓아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한다. 가부키는 옛 전통 방식을 가진 현대의 일본 공연 예술이기 때문이다.

탈춤에서 ‘미녀와 야수’를 하는 건 어떨까. 판소리로 ‘아서왕 이야기’를 듣는 것도 상상해본다.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이 알면 기절할 노릇일 수도 있지만 2017년에 스마트폰으로 지도 어플을 켜고 지하철을 타고서 가부키를 보고 왔던 나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부키좌는 히가시 긴자역 3번 출구에서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든지 극장을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지하철역과 연결해놓은 것이다. 옛 건축은 그렇게 현대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아서왕 이야기를 판소리로 하게 되어 오래된 전통 방식이 사라질까 하는 염려보다도 이대로 뒀다가는 그 누구도 찾지 않아 판소리도, 탈춤도 사라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전통이 현대 사회에서 재탄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사진 제공 – 가부키좌 공식 홈페이지 / 가부키 프로덕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