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하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연극 <고발자들>(박상현 작·연출, 2017.09.22 ~2017. 10.15, 나온 씨어터)은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내부고발자들의 여러 사건들을 엮어 심쿵한 연극을 선보였다. 그런데 그 심쿵은 썸을 타며 심장을 간지럽히는 발랄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으로 질병을 유발하는 역설적인 탈바꿈의 그것이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조직 내부에서 저지르는 부정부패와 비리를 외부에 알림으로써 공공의 안전과 권익을 지킬 때’ 우리는 그것을 ‘내부고발’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을 2002년부터 시행하여 공공기관 내부고발자 보호를 표방하고 있다. 내부고발자들은 어떻게 보면 ‘지배받는’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외부에 알릴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편승하여 도리어 한몫 잡을 것인가…, 심란한 기로에서 자신의 불이익을 감내하고 용기 있게 자신도 속한 단체의 허물을 외부에 알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 영웅들을 ‘지배하는’ 영웅처럼 우러러보지만은 않는다. 미꾸라지, 먹칠하는 자, 공적, 특히 분단의 한국에서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종북의 딱지까지 붙여가며 손가락질을 해댄다. 그러한 손가락질은 지배자도 하지만 대체로 지배받는 자들이 더 많이 한다. <고발자들>에는 이렇게 손가락질하고, 손가락질당하는 다양한 군상들이 얽히고설킨다. 비자금관리 장부를 발견한 대기업 임직원, 목사의 부정축재와 성범죄를 알게 된 교회 집사, 발병한 혈액을 유출하여 희생자를 만들어낸 사실을 알게 된 적십자사 직원, 군의 부정선거와 무기의 결함을 알게 된 군 복무자, 공직자가 기물 횡령으로 부정적인 정치 운동을 벌인 사실을 듣게 된 여사무원, 강제적인 종교수업을 거부하며 항의하는 학생 등 사회의 각종 비리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내부고발자들의 이야기들이 ‘심쿵’하게 펼쳐진다. 다른 조직의 다른 사람들, 다른 상황들임에도 상황들은 엇비슷하게 전개된다. 발견, 의심, 망설임, 결심, 부당한 처우, 발병의 전조, 투쟁의 지난한 과정, 고뇌와 두려움, 망설이거나 익명 뒤에 숨기, 질병의 심화, 투쟁의 승리 혹은 패배, 고발자들의 불행해진 주변 환경… 비슷한 상황들은 파편화한 대사들과, 인물들로 해체되어 재배치되었다. 배우들은 피해자도 되었다가 가해자도 되면서 역할과 의미를 씨줄과 날줄로 교차시킨다.

파편화한 물결처럼, 조각난 퍼즐처럼 텍스트는 흩어지고 구성은 해체되었다. <고발자들>의 단편화하고 파편화한 모습들은 우리가 세상을 접하는 방식과 닮았다. 띄엄띄엄 머리기사를 훑듯이. 흩어진 텍스트를 응집시키는 것은 뒤틀리고 병든 몸들과 절규들이었다. 배우들의 절규하는 몸들은 퍼즐 조각처럼 각기 떠돌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뿜어대다 사슬처럼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쇠약하고 병든 몸… 불안증, 우울증, 부정맥, 소화 장애, 병든 몸은 약을 부르고 약은 다시 부작용을 낳아 정신적 환각과 폭력으로 심화한다. 정신과 육체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인간의 정신을 위로하던 종교도 더 이상 영혼의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육체적 질병은 뒤틀림으로, 소리 없는 절규가 된다. 그러한 몸과 절규는 13명의 배우들을 통해 마치 책을 낭독하듯, 때로는 감정의 과잉으로, 때로는 냉소적인 비웃음으로, 전형적인 인물들 속에서 배우들이 순간순간 뿜어내는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응집하여 분출되었다. 그러한 연기는 마치 벽 뒤에 숨어 있다 슬쩍 고개를 들이밀듯이 전형성 뒤에 숨은 배우들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묘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때로는 뒤틀린 몸들의 무더기 위로 어딘가로 향하는 익명의 흰 그림자들을 영사하기도 한다. 빛과 그림자의 도치처럼 흰색의 그림자는 어두운 옷을 입은 실물배우들과 대조되어 고발자와 고발당하는 자, 손가락질하는 자와 손가락질당하는 자들의 위치가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무대 위 배우들과 무대 밖 관객들의 위치도 언제든 바뀔 수 있음도. 이러한 암시는 철제 다리에 판을 덧댄 의자들의 배치에서도 드러난다. 개인들은 의자를 마음대로 재배치하지만 결국은 또 다른 배우들이 나타나 재배치하고 그 고리는 연속된다. 배우들은 사회의 틀들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 틀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또한 직사각형의 다섯 출입구가 정면에 나 있어 배우들이 그 뒤에 서면 구조물의 그림자가 배우들 얼굴 반을 가려 마치 몸을 숨긴 듯, 의심하는 듯, 그림자와 실물 배우들을 병치시킨다. 정작 개입해야 할 때는 지켜보기만 하고, 무표정한 정보들만을 낭독하는 언론의 역할은 무대와 무대 양쪽 전면에 높고 좁다란 의자에 앉은 두 배우가 맡았다. 두 배우도 때로는 고발자가 되기도 한다. TV 화면과 같은 사각형의 무대 뒤 벽에는 파면이나 대법원의 판결 등과 같이 고발자들이 조직을 상대로 하는 투쟁의 결과를 영사하고 그 옆에는 언제나 잘 보이도록 벽시계가 붙어 있다. 그리고 앞쪽에는 마이크를 놓고, 오염된 세포들을 연상시키는 검회색이 흩뿌려진 무대는 무대와 비슷한 회색과 검정이 흩뿌려진 의상과 짝을 이룬다.

고도로 발달한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해체된 구성의 연극 <고발자들>은 해체와 만남을 반복하면서 틈을 만들어 내고, 그 틈이 쌓여 순간적인 감정의 폭발을 이루기도 한다. 그 폭발의 도화선이 되는 비틀어진 몸들이 폐차장의 짜부라진 차들처럼 첩첩이 쌓일 때 의자에 앉은 무표정한 지켜보는 자 둘은 배경음악처럼 약의 이름을 그 몸들 위로 낭독한다. 장엄한 슬픔이 밀려온다. 탄탄한 스토리가 주는 감동에 못지않은 존재의 비장함과 슬픔을 각성하게 되는 소중한 순간을 맞는다. 하지만 초반부에서 느꼈던 강렬한 배우들 몸의 존재감은 극의 후반부까지 응축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유사한 몸의 절규들이 반복될수록 자극은 무디어져 무대 뒤 벽시계의 존재 이유를 남은 공연시간을 재는 데 쓰게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 퍼즐을 맞추며 성취감을 이룸으로써 우울함을 달래었고 그것은 건전한 놀이문화로 자리 잡았다. 현대인들에게 퍼즐은 친숙한 놀이이자 고급 인테리어 장식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고발자들>의 퍼즐 맞추기는 즐겁지만은 않다. 관객들에게 자기 스스로가 퍼즐 조각을 손에 들고 즐기며 놀이하는 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들린 퍼즐의 한 조각이 되는 씁쓸함을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병든 몸들의 조각이 완성되려는 찰나 허물어지는 퍼즐 조각 하나가 자신일 수도 있음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퍼즐의 어느 한 조각이라도 어긋나면 완전할 수 없음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표정을 한 배우들의 커튼콜처럼 <고발자들>은 어둡고 음침한 한국인의 또 다른 초상을 하나를 보게 만들었다. 윤동주의 ‘자화상’처럼 외따로 떨어진 우물 속에 비친 또 다른 내 모습이기도 한, 가엽기도 밉기도 그립기도 한 우리의 초상화.

“내 아들은 결코 고발하지 않기를 바란다… 차라리 패소라도 했으면…” 마지막의 회한 어린 고발자들의 고백 속에는 승리했으나 열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슬픈 희망이 깃들어 있다. 불의는 어디에나 있다. 블랙리스트와 같은 국가적인 비리에서부터 과자 하나를 두고 다투는 형제의 소소한 싸움에 이르기까지. 승리자가 되고 싶은 현대인들 중 아무라도 ‘명령하는 자’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될 수 있다. <고발자들>은 어제는 고발자였으나 오늘은 고발당하는 자가 되기를 꿈꾸는, 마음 한편의 음험한 욕망을 향해 호루라기를 분다.

(사진 제공 – 그린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