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한국은 두 가지 큰 변화를 겪었다. 하나는 김대중 당시 대선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이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와 맺은 구제금융 협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외환위기를 겪게 되는, 이른바 ‘IMF 시대’의 개막이었다. 두 사건으로 한국 사회는 격변한다. 그 여파는 오늘도 계속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다원예술 2017 아시아 포커스’ 초청작 <쿠쿠>(CUCKOO)는 아티스트 구자하가 IMF와 한국 사회를 성찰해 빚어낸 작품이다. 구자하 개인의 경험은 가지를 뻗어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로 연결됐다. 이야기를 매개하는 중심에는 전기압력밥솥 ‘쿠쿠’가 있었다.

쿠쿠와 자하

무대 정중앙 검은 테이블 위 쿠쿠 세 대가 놓여있다. 관객이 들어오는 동안 좌측에 놓인 쿠쿠는 밥을 짓고 있다. 객석이 어느 정도 찼을 무렵, “증기 배출을 시작합니다”라는 쿠쿠의 대사와 함께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얼마 후, 밥이 완성되었다는 쿠쿠의 말을 시작으로 객석이 어두워지고 영상이 투사된다. 대한민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양해 각서가 체결되는 현장, 그 소식을 전하는 지상파 뉴스 앵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 2017년 오늘의 한국 사회와 그 병리적 모습을 함축해 보여주는 장면의 조각들. 영상은 IMF가 낳은 우리 사회의 풍경을 한데 모았다. 한국 사회의 질병을 써낸 진단서이자, 20년 가까이 그 병마와 싸워온 투병기였다.

영상이 끝나고 자하가 등장한다. 그는 덤덤히 걸어와 세 대의 쿠쿠 앞에 선다. 그리고선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자신을 소개하던 자하는 14세 때 IMF 사태를 맞이했던 당시 한국 사회를 이야기한다. 이후 자하의 이야기는 IMF를 겪은 이후 병들어 기괴해진 오늘 우리 사회로 확장한다.

자하가 28세에 유럽으로 넘어갈 때 가져간 것 중 하나가 바로 쿠쿠다. 전기압력밥솥 쿠쿠는 1998년 처음 탄생했다. 당시 IMF로 인해 어려운 경제 여건에도 성공을 거두어 국내 최고 밥솥 브랜드가 된 신화적인 제품이다. 제목에도 나타나듯, 쿠쿠는 공연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매개이자 상징이었다. 홀로 지내던 자하는 어느 날 안정된 삶을 상상하다가 현실을 인식하고 고립감을 느낀다. 그 순간 자취방에서 울린 쿠쿠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과 사회가 겪는 고립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자하는 ‘압력밥솥’이라는 쿠쿠의 정체성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포착한다. 그가 본 한국 사회는 ‘압력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하가 쿠쿠를 소개하자, 두 대의 해킹된 쿠쿠가 말하기 시작한다. 말투는 어색하지만, 실제 사람이 할 법한 여러 말을 쏟아낸다. 오디오 싱크에 맞춰 밥솥 전면에 나오는 LED 불빛은 쿠쿠의 표정이다. 두 쿠쿠는 다양한 말과 표정으로 각자의 자랑을 늘어놓으며 대화한다. 곧이어 자기 자랑이 상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변한다. 무대 위엔 두 쿠쿠가 내뱉는 욕설이 난무한다. 객석에선 피식피식 웃음이 터진다.

IMF를 이겨낸 쿠쿠 두 대는 뜯기고 개조되어 이전과는 다른 형태가 되었다. 겉으로는 LED 불빛을 반짝이고 LCD 화면까지 장착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밥하는 밥솥이 아니다. 사람처럼 말하고 싶고, 자신의 쓸모와 존재를 입증하고 싶은 욕망을 가졌지만, 그들은 밥솥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기괴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도 둘은 누가 더 잘났는지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두 쿠쿠 옆엔 밥을 보온하고 있는 해킹되지 않은 멀쩡한 쿠쿠 한 대가 놓여있다. 자하는 그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는 코믹하고 그로테스크한 대화를 웃지도 않고 덤덤히 응시한다. 그 둘에게서 자신과 이웃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 아닐까?

자하와 이웃, 그리고 IMF

자하에겐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발랄하게 뛰며 춤추는 것을 좋아해 자하는 그 친구를 ‘제리’라고 불렀다. 제리는 일찍 결혼해 아이도 한 명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자하는 제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큰 충격을 받은 자하는 제리의 죽음이 IMF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리의 죽음을 비롯해 IMF 이후 조각난 사회 구성원들이 경험한 좌절, 특히 젊은 세대가 겪는 절망과 냉소를 두고 자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움직일 동력도 얻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침잠하는 상태.

IMF 이후 우리 사회가 쪼개지고 기괴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하는 그 대표적 장본인이자 상징으로 로버트 루빈을 소개한다. 극장에 울려 퍼지는 빠른 템포의 전자 음악은 “로버트 루빈, 클린턴 정부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 골드만삭스 회장 출신”이라는 가사를 반복한다. 타임지가 ‘세계를 구한 위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한 루빈이지만, 자하의 눈에는 ‘클린턴 정부 재무부 장관’과 ‘골드만삭스 회장’이라는 두 정체성으로 똘똘 뭉친 괴물일 뿐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루빈이 내놓은 해법은 이후 한국 사회가 기괴한 질병에 걸리도록 만든 주원인이다. 그가 상징하는 세계 시장자본주의는 구제 금융의 대가로 한국에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했다. 기업은 줄줄이 망했고, 실직자들이 폭증했다. 그때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급증해 오늘날 노동 환경의 고질적 문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로버트 루빈, 클린턴 정부 재무부 장관. 로버트 루빈, 골드만 삭스 회장 출신”의 반복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반복되는 마디 사이로 한국 사회의 신음이 들리기 때문이다. 노래가 나올 때 자하는 해킹된 쿠쿠들의 뚜껑이 연다. 그 안엔 루빈의 얼굴이 붙어 있다. 그리고 자하 본인도 루빈의 가면을 쓴다.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분할 수 없는 ‘루빈-들’이 괴물처럼 복제된다. 그 괴물은 밥을 만드는 밥솥과 그 밥으로써 생존하는 인간을 넘나든다. 표정 없이 복제되는 괴물을 보고 있자니, 뒤통수가 서늘해진다. 그 괴물이 나를 아프게 했고, 우리 이웃을 죽게 했기 때문에.

쿠쿠와 한국 사회, 압력 사회에 압사된 사람들

괴물이 죽인 이웃. 자하는 지난 2016년 5월 28일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인해 사망한 김 군을 떠올린다. 외주 업체에 소속되어 스크린도어 수리를 맡아 하던 김 군은 당시 19세였다. 열악한 근무 환경과 소홀한 관리 체계라는 구조적 문제가 초래한 죽음이었다. 자하는 김 군의 죽음에서 제리의 죽음을 떠올렸다. 둘의 죽음이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크린도어 역시 IMF와 연결된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부동산과 주식 거품 경제가 붕괴해 자살이 급증했다. 그때 자살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방법은 지하철 선로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스크린도어다. IMF 이후 일본의 자살률을 넘어선 한국도 자살을 막기 위해 스크린도어를 설치했다. 김 군의 죽음은 자살을 막으려고 만들어진 스크린도어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자하는 우리 사회가 ‘누군가 죽어야만 굴러가는 사회’임을 깨닫는다.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꾸역꾸역 사람을 압박하며 희생을 조장하는 사회. 자하는 이러한 ‘압력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지난 20년간 한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지금도 제리나 김 군 같은 젊은이들이 죽음의 문턱에 올라서고 있다. 청년 실업, 헬조선, N포 세대라는 슬픈 담론 안에서 그들은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한 채 자책하며 냉소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건 압력 사회의 압박과 열기다. 한국이라는 압력밥솥 안에서 으깨지고 바스러지는 사람들은 가장 무고하고 약한 타자들이다.

퍼포먼스 끄트머리. 관객의 시선은 맨 처음 밥을 짓던 멀쩡한 쿠쿠로 되돌아간다. 자하는 밥을 완성해 보온하고 있던 쿠쿠의 뚜껑을 연다. 압력 사회를 상징하는 쿠쿠에선 뜨거운 김이 피어오른다. 자하는 밥을 통째로 꺼내 테이블 위에 엎는다. 커다란 밥 덩어리는 그동안의 역경을 표출하듯 힘겹게 열기를 내뿜는다.

자하는 밥을 주걱으로 퍼서 자그마한 통 안에 넣고 누른다. 꽉 눌러 으깨지고 뭉쳐진 밥알 뭉치는 작은 한 덩이가 된다. 그리고 그걸 한구석에 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밥알 뭉치를 만들어 쌓는다. 탑을 쌓듯 세워진 밥알 뭉치들은 압력 사회에 짓눌려 살던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다. 밥으로 쌓은 ‘밥-탑’이 네 층으로 쌓였을 무렵, 제힘에 못 이겨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무너진다. 그 모습은 여러 사건을 연상시킨다. 백화점이 붕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배가 침몰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하는 밥-탑이 쓰러지는 모습을 서글프게 응시한다. 그러다가 다시 밥을 퍼서 무너진 밥들의 잔해 옆에 새로운 탑을 쌓는다.

자하가 밥으로 탑을 쌓는 동안 음악이 깔리면서 공연 중 나왔던 대사들이 하나씩 튀어나온다. 밥알 무리 속에는 IMF 피해자들, 제리, 김 군, 그리고 우리가 있다. 무대에선 그렇게 밥알 같은 우리들이 무너지고 으깨지고 있었다. 자하는 새로 쌓은 3층의 밥-탑 위에 밥으로 만든 작은 사람 모형을 올려놓는다. 그 작은 사람이 올라선 3층 밥-탑 역시 천천히 무너진다. 고요히 압사한 밥알과 우리들. 그와 동시에 어두워진 조명은 이에 고개를 돌리는 듯 혹은 추모하는 듯 압력 사회의 안녕을 기린다.

자하와 쿠쿠, 그리고 연극

<쿠쿠>에는 전문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 본인과 세 대의 쿠쿠가 배우의 역할을 대신한다. <쿠쿠>의 텍스트를 충실히 전달하거나 상황을 재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쿠쿠>의 언어 자체가 주는 아이러니와 비판적 사고를 유도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밥솥 배우’는 그 아이러니와 틈새를 잘 보여주었다. 해킹된 밥솥들이 어색한 말투와 일상적인 대사로 티격태격 경쟁하는 모습은 실제 인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거리 두기는 밥솥들이 경쟁하는 기괴함이 어느 순간 우리와 상당히 닮았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같은 대사라도 누가(무엇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의미와 감각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약 숙련된 배우가 쿠쿠들이 했던 역할을 연기했다면, 공연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밥솥이 발화했기에 텍스트가 더욱 돋보였다. 밥솥의 붕 뜬 목소리와 말투, LED로 표현하는 감정은 이질적인 재미를 더했다. 영상과 음악이 교차하며 리듬을 조율하면서도, 무대 정중앙에는 세 대의 밥솥과 자하가 한결 같이 관객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 공간에 예술가-밥솥-관객이 현존하며 다양한 질감의 의미를 지속해 교환했다. 이는 분명 <쿠쿠>가 보여준 ‘연극성’이었다.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을 띤 <쿠쿠>는 탄탄한 리서치가 뒷받침했다. 그러나 연구한 내용을 단순히 설명만 하지는 않았다. 개념을 시각적으로 나열하거나, 현란한 연출로 퍼포먼스를 지탱한 것도 아니다. 리서치가 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했다면, 거대한 주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서사’였다. 전통적인 드라마와는 많이 달랐지만, <쿠쿠> 공연 전반에는 나름의 서사가 담겨있었다. <쿠쿠>는 아티스트 구자하를 X축에, IMF라는 사건을 Y축에 놓고, ‘지금 여기의 나’ 라는 Z축을 서사로써 연결한다. 자하와 제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 제리와 IMF를 잇는 스토리, IMF와 김 군을 연결하는 이야기, 그 모든 것을 우리 모두와 묶어내는 ‘서사’가 <쿠쿠>의 X-Y-Z를 잇는 힘이었다.

<쿠쿠>를 기존 전통대로 장르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쿠쿠>가 생소한 연극성과 새로운 방식의 서사 구축을 통해 기존 연극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음은 분명하다. 공연을 보는 동안 쿠쿠와 자하가 수행한 한국 사회의 현실은 서글펐으나, 그들이 자극한 연극적 상상력은 유쾌한 가능성을 품에 안고 극장을 나설 수 있게 했다.

(사진 제공 – Wolf Silveri / MMCA(국립현대미술관) / 정은경 / Steirischer Herbst / Pianofabri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