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첫 공연을 앞두고 있는 연극 <1984>의 드라마터그 손원정을 한성대 근처 작은 커피숍에서 만났다. 소년 같이 맑고 앳된 인상의 손원정은 인터뷰 내내 조용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는 차분하지만 쉬이 흔들리지 않는 강단과 연극에 대한 넘치는 애정이 묻어났다. 연극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드라마터그는 그런 연극을 계속하기 위한 선택일 뿐이라는 그녀에게 드라마터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연극은 그래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같아요. 무대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이상한 이중성 때문이겠죠. 어떤 말을 해도 허구의 겹이 입혀지고, 무엇에 대해서도 쉽게 상상할 있게 하는 같아요. 무대에서만이 있는 특정한 방식, 이상함 연극을 아름답게 만드는 같아요.

손원정 Profile

이름 : 손원정

직업 및 소속 : 드라마터그 겸 번역가 / 코끼리만보

첫 드라마터지 작품 : <오랑캐 여자, 옹녀>(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

가장 애정하는 자신의 작업 : <말들의 무덤>(김동현 구성 및 연출)

가장 좋아하는 연극 : 김현탁, 윤한솔 연출의 작업들

(어딘가 불편함을 주는 작품들을 재밌어하고 좋아함)

덜 외롭기 위해 선택한 길, 연극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손원정은 희곡을 공부하면서 처음 연극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부 때 수업에서 희곡을 처음 접해 읽게 되었고, 심적으로 힘들던 어느 날, 베케트의 작품과 만났다고 한다. 그때가지 살면서 한번도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적이 없다던 그녀는 베케트의 작품을 만난 뒤, ‘만약 구원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연극이 나에게 구원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손원정이 특히 매료된 희곡은 베케트의 단막극들이었다. 손원정은 무대 위의 공간 연출이 작품의 의미를 좌우하는 베케트의 단막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과 연극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희곡을 알기 위해 선택한 길이 연극의 길이었다.

연극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손원정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에 입학했다. 희곡을 잘 알고 싶어 진학을 마음먹었던 그녀이지만, 정작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연극에 더 빠져들었다고 한다. 계속 영문학을 공부해오던 그녀는 연극이 문학보다 조금 덜 거짓말을 한다고 느꼈다. 더욱이 연극이 덜 외롭다고 느꼈다. 연극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극을 통해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서로를 이해하고 완벽하게 믿는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처음은 어려웠다. 연극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맞닥뜨린 첫 작품은 너무도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았다. 손원정은 전문사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배삼식 작, 김동현 연출의 <오랑캐여자, 옹녀>에 드라마터그로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드라마터그’라는 단어 자체도 들어본 적 없던 상태인데다, 참여 작품이 창작극이었기에 더더욱 공연 팀에 뚝 떨어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 대본이 매일 바뀌었고, 연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대본 안에서 부딪히는 것들, 찾아내야 하는 일거리들을 충분히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초반에는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영문학 전공자이다 보니 아무래도 작가의 편을 들게 되어 끝나고 나서 드라마터그로서 공정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첫 작품부터 창작극의 드라마터그를 맡다보니 어려움도 많았지만 동시에 얻은 것도 컸다. 손원정은 첫 작업에서 희곡을 창작해가는 과정과 이를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동시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전공이었던 영문학적 사고에서 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창작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녀는 배우의 발화방식, 무대연출의 방식, 관객과의 소통방식 등, 무대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연극적 요소들에 대한 사고와 감각을 보다 빨리 익히게 된 것이다.

고전 작품이 아니기에 운이 좋았던 부분도 있었어요. 리허설 안에서 대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훨씬 빨리 익히게 되었고, 언어가 어떻게 발화되는지를 보면서 대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접해서 덕분에 사고가 나름 빨리 유연해진 같아요. 훨씬 빨리 극장적인 사고로 전환할 있었던 같아요.

뿐만 아니라 이 첫 작업에서 그녀의 연극여정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오랑캐 여자, 옹녀>를 연출했던 연출가 김동현과는 이때의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작업동반자이자 부부가 되었다. 손원정은 김 연출이 창단한 극단 ‘코끼리만보’에서 연출가와 모든 과정과 이해를 공유하며 드라마터그로서, 또 연극인으로서 성장해나갔다. 극단 코끼리만보 사람들 역시 그녀와 오랜 기간 연극관을 공유하면서 함께 해왔다. 그렇기에 코끼리만보의 지향점에는 연극적 상상력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손원정의 연극관이 묻어난다. “묵직하고 느리게, 그러나 어느 순간 속도와 무게를 상상의 힘으로 털고, 나는 코끼리처럼“ 연극은 ‘은유와 상상의 힘으로 낯설음과 일상 사이의 소통과 긴장을 제공할 수 있다’는 코끼리만보의 믿음처럼 손원정 역시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연극을 꿈꾸며 연극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덜 아는 드라마터그

손원정은 드라마터그를 ‘잘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잘 보는 사람’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정답을 찾아내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잘 보는 사람은 누구보다 열심히 정성스럽게 보고, 본 것을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녀는 자신을 ‘덜 아는 드라마터그’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답을 찾아내 알려주려는 드라마터그가 되기보단, 팀 내에 창작 과정이 계속 연결되고 발전되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드라마터그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이 정답은 아니기에, 작품에 대해 연출가와 끊임없이 이야기 나눈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드라마터그의 견해가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을지라도, 연출가는 필연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드라마터그가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면 연출들은 거부감이 되었든 동의가 되었든 간에 어쨌든 반응을 하는데, 훌륭한 연출가들은 이 자극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연극으로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손원정의 드라마터지 방식은 연출가가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복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손원정은 탄탄한 희곡 텍스트가 있는 작품에서 드라마터그를 맡아왔다. 물론 <말들의 무덤>과 같이 코끼리만보가 공동창작으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동시대 극작가의 희곡이나 고전 희곡을 바탕으로 하는 연극에서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졌다. 후안 마요르가의 <영원한 평화>, <천국으로 가는 길>, <맨 끝줄 소년>나 한현주의 <그 샘에 고인 말>, 박상현의 <고발자들>, ‘한민족디아스포라전’의 작품들, 로버트 아이크(Robert Icke)와 던컨 맥밀런(Duncan Macmillan)이 조지오웰의 소설을 재창작한 <1984>에 이르기까지 손원정은 재기발랄하면서도 치밀하게 주제를 파고드는 동시대 작가들의 희곡을 분석하고 어떻게 ‘지금, 여기’의 관객과 의미 있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이처럼 기존 텍스트가 존재하는 경우, 손원정은 드라마터지 첫 단계에서 연출가와 희곡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자 한다. 문학전공자이기도 한 그녀는 가능한 한 성실하게 희곡을 읽고 각자가 이해한 작품이 어떤지, 어떠한 방향으로 공연을 만들어가야 할지 초반에 집중적으로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또한 중간에 문화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거나 시대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조사하고 설명하는 일을 맡기도 한다. 그 후, 희곡의 윤색을 시작한다고 한다. 희곡 속 언어들을 무대의 말에 맞게,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발화할 수 있는 말로 최대한 고친다. 이때, 손원정이 드라마터그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상징을 죽이는 일’이라고 한다. 그녀 생각에 희곡 안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말들, 숨어있는 의미들을 찾아내 연극 무대 위에 올리면 도리어 절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윤색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말들, 드러나는 장면들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담으려고 노력한다.

연습의 초반 과정이 끝나고 블로킹 단계에 들어가면 손원정은 연습실을 피한다고 한다.

가려고 해요. 연출들이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대신 블로킹이 끝나면 다시 연습실에 가서 열심히 보고, 블로킹 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요.

연습 후반부에 손원정은 드라마터그로서 처음 구상했던 연출 개념이 블로킹 이후 무대에서 잘 구현되었는가를 봐주는 역할에 집중한다. 이를 위해선 프리프로덕션 과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프리프로덕션 때 공유되었던 주제나 방향을 바탕으로 과거에 연출가가 연출적으로 어떤 개념을 가졌었는지 다시 상기를 시켜야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런 방향을 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이것이 당신이 원했던 방향이 맞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계속 던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리허설 초반부에는 희곡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성실하게 이야기하는 일에 집중한다면, 후반부에는 연습장면이 어떻게 보이는지 열심히 이야기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현재 준비 중인 작업들

현재 손원정은 두 편의 공연에 참여중이다. 하나는 드라마터그로 참여한 한태숙 연출의 연극 <1984>이고, 다른 하나는 연출을 맡게 된 <are you okay?>이다. 우선 현재(11월 1일, 발행일 기준) 공연하고 있는 국립극단의 <1984>는 영국출신 연출가 로버트 아이크와 던컨 맥밀런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앞뒤를 붙이고 시공간을 뒤섞어 각색한 버전이다. 드라마터그로서 손원정은 각색본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연출가는 따라가기 어려운 각색본의 어지러운 구성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고민했는데, 손원정은 각색본의 어지러움이 어떻게 현실의 모호함을 드러내고 현 시대와 맞닿을 수 있는지 최대한 설득했다고 한다. 손원정은 연출을 맡은 한태숙 연출가가 열려있는 연출가였기 때문에 원만하게 절충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태숙 연출이 많이 듣기를 원하고 팀원들에게 계속해서 질문하고 같이 찾아가는 것을 원하는 연출가이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팀원들이 열정적으로 고민하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손원정은 이러한 과정 덕분에 한국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길을 많이 찾은 것 같다고 한다. 손원정의 말 속에서 공연 <1984> (~11.19. 명동예술극장)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손원정이 참여중인 또 다른 연극은 12월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예정인 <are you okay?>이다. 이 작품은 손원정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손원정의 첫 연출작은 올해 4월 연출가 김동현을 추모하기 위해 재공연한 <맨 끝줄 소년>이다. 2015년 초연 당시 <맨 끝줄 소년>의 드라마터그였던 손원정은 그 당시 연출과 완벽하게 서로를 믿고 이해했고, 연출의 영역을 침범하는 제안을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모두 시도해보는 방식으로 연습이 진행되었었기 때문에, 연출로 역할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품 해석에 대해 완벽하게 동의가 된 상황이었기에 원작 훼손에 대한 염려는 없었지만, 최종 결정에 대한 책임이 주는 무거움은 느꼈다고 한다. 현재 손원정과 코끼리만보가 준비 중에 있는 <are you okay?> 역시 연출가 김동현의 연극을 기억하기 위한 공연이다. 이 공연은 코끼리만보가 했던 기존의 공동창작 작품들을 묶고 새로운 글쓰기를 덧붙여 재구성, 재창작될 예정이다.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끈끈한 동지애로 뭉친 코끼리만보의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 손원정에게는 무거우면서도 귀중한 시간이 될 것 같다.

손원정은 현재 한국연극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드라마터그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드라마터그’라는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듯 보였다. 어떻게든 연극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싶었고,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역할이 이야기적인 부분, 문학적인 부분이니까 자연스럽게 드라마터그의 역할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손원정. 그녀에게서 드라마터그라는 역할 자체에 대한 자긍심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연극에 대한 깊은 애정이 전해져왔다. 드라마터그 역시 연극을 만드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기에, 결국 드라마터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마터그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연극 자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아닐까.

(사진 제공 – 예준미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