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는 술을 마시나?

: 극장에서는 왜 술을 마시지 못할까?

: 그러니까! 연극을 보다 보면 배우가 맛있게 담배 태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담배가 진짜 당긴다. 술 마시는 장면에서도 같이 술 마시고 싶지 않나? 작품의 성격에 따라 극과 동화되어 관객이 객석에서 함께 술을 마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모든 공연들이 다 극장 규정에 맞춰져 있다. 하드웨어인 극장과 소프트웨어인 작품이 서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어떤 공연은 관객과 직접 교감하고 싶어도 할 수조차 없다.

: 아무래도 제작 극장이 많지 않고, 대개 극장은 하나의 규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프로덕션엔 허용을 해주고 어떤 프로덕션엔 허용을 안 해줄 수 없다. 또한 많은 관객들이 샘이 언니의 생각과 같지 않을 거라고 본다. 담배 연기를 마셨을 때 누군가는 기침을 할 수도 있고, 취객이 극장 안에 있을 때 걱정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모두가 다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장은 공공장소이기 때문이다.

: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규정을 만드는 상황이 창작자와 함께 만들어진 규정인가 이다. 시설물 관리와 극장 운영이 함께 조율해서 만들어진 부분인지 극장 규정이 관객이나 연극인들 사이에서도 공유가 잘 돼 있는지 의문이다.

: 나는 혐향권을 존중한다. 아마 통제를 위해서 극장들이 그런 규정들을 만든 것 같다. 하지만 ‘공연장에서 굳이 술을 마셔야 하냐?’라고 본다면 반대로 굳이 안 마셔야 할 이유는 있을까?

: 극장에서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술을 마신 사람의 음주 후 태도가 문제다.

: 모 공연장에서 공연장안내원으로 1년 동안 일을 하면서 경험한 것은 극장에는 다양한 관객들이 온다는 것이다. 취객이 오기도 했는데, 그들 때문에 무대 위 배우의 집중이 흐려진 적도 있다. 그 분들이 객석에서 떠드니 배우가 당황하더라.

: 보통 연극 연습을 할 때, 창작자들은 관객들을 정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연습을 하다 보니 객석에서 심하게 떠들어버리면 당연히 당황하지 않겠나.

: 취객 제재에 대한 부분은 우리나라 술 문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가 특히 술에 관대하다. 유럽에서는 술을 마시고 실수해면 봐주는 문화가 아니니까 극장에 술을 마신 사람이 와도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술 마시면 봐줘도 된다는, 마치 깍두기 같은 느낌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게 이상하지 않게 여겨진다. 그렇다 보니 극장에서 이를 엄격히 제재하는 것 같다. 술 먹고 문제를 일으키면 관객한테 확실히 책임을 물면 이런 풍경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문제적 인간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애초에 술을 마시는 것 자체를 단절시켜버리는 게 아닌가.

: 만약에 큰 극장에서 술을 먹고 관객끼리 난동을 피우게 되면, 문제가 생긴 관객끼리 해결하는 게 아니고 안내원한테 ‘안내 똑바로 안 하냐? 통제를 왜 제대로 안하냐?’라며 컴플레인을 건다. 그럼 책임자는 해당 관객이 아닌 안내원을 탓하고 모든 화살이 안내원에게 향한다. 내가 만약 극장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편하기 위해서 극장의 통제가 필요할 것 같고, 관객 입장에서는 통제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다양한 입장이 모두 이해가 간다. 사실 안내원도 제지하는 거 귀찮다. 통제하러 가면 관객이 불쾌한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한편 관객 입장에서는 관크(관객 크리티컬 critical; 공연 관람에 방해를 주는 행위)가 싫기도 하고, 반면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기도 한다. 이런 다중적인 입장들이 해소되지 않으면 계속 혼란스러울 것 같다.

극장 엄숙주의 이대로 괜찮은가?

: 극장에서는 담배나 술뿐만 아니라 껌이나 음료 등의 반입, 출입 문제, 대화 금지 등 여러 제재가 존재한다. 이는 연극을 집중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래서 관극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다 금지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엄격한 관극문화, 극장 엄숙주의에 대해 얘기해보자.

: 연극을 보다가 집중이 흐트러지면 내 권리를 침해받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연극이라는 장르 특성상 집중해서 봐야하고, 대사를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대개 연극이 언어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대사를 놓치면 공연 전체를 놓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소리에 민감해진다. 아이러니하게 그게 나한테 한편의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공연 보는 도중에 내 몸에서 소리가 날까 걱정되어서 극장가기 2시간 전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이 옆에서 시끄럽게 하면 짜증난다.

: 엄격하고 경직된 관극 자세를 꼭 갖춰야 하나? 연극 역시 엔터테인먼트라는 측면에서 볼 수는 없을까? 너무 전통적 관습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 현재 한국의 이런 극장 문화는 수입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전통적이라고 볼 수 없는 게 판소리 같은 전통 공연은 관객들과의 소통이 필수적이었다. 실내 공연 문화가 수입되면서 객석과 무대 사이를 나누는 무언가가 생겼고 그게 관객들의 추임새를 금기시 하는 문화로 이어졌다. 무대에서는 ‘얼씨구! 절씨구!’ 하는 추임새 넣어달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못한다. 극장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다.

: 그런 상태에서 공연을 보며 발견할 수 있는 건 굉장히 한정적이다.

: 관극 문화, ‘문화’가 아니라 ‘규칙’이 됐다. ‘통제’가 됐다. 강제적인 규칙이 ‘문화’라는 이름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 규칙을 따르고 있다. 규칙이 생긴 이유는 모른 채 그냥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런 극장 규칙을 누가 정했는지 궁금하다. 선배들이 만들지 않았을까?

: 어떤 선생님께서 수업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평론하는 사람들은 절대 술 마시면서 관극하면 안 된다고. 잠도 충분히 자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연을 봐야 한다고. 최고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객석에 오르라고.

: 그런 게 바로 엄숙주의라는 거다.

: 일반적인  경우 규정을 만들 때 여러 가지 수를 고려해서 만들었겠지만 조금은 유연하게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바꾸는 방법도 모르겠고, 그에 대해 의견 피력을 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다.

: 컴플레인을 하면 된다. 극장의 규칙들은 관객의 컴플레인 때문에 생긴다. 컴플레인이 누적되면 그게 규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극장마다 하우스 매니저마다 규칙이 다르다. 극장이라고 해서 같은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 극장에서 난동부리는 사람, 피해주는 사람을 문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법적으로 혹은 규칙을 세워서 해결하는 게 편하다보니 계속 편한 쪽으로만 유지하려고 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됐다. 이제는 문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 이렇게 엄숙주의, 경직된 문화가 발생하다 보니 공연 시간 중 극장이라는 시공간은 조그마한 일탈 혹은 예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공간이 되어버린다. 그 중에서 누구보다 피해를 받는 것은 장애인인 것 같다.

: <연극의 3요소>랑 <불편한 입장들>이라는 작품들을 보면 장애인 관객 및 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작품들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특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완전히 분리된 사회인데다가 장애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장애인들이 생리적 혹은 신체적인 이유로 소음을 내는 것이 정말 당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겁니까?”라고 물어봤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극장 에티켓이라는 게 비장애인 중심으로 짜여 있는 것 같다.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권리를 박탈하는 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엄숙주의라는 것이 비장애인한테는 자유의 침해 혹은 배려의 문제지만, 그 대상에 있어서 장애인 등 특정 집단 자체를 배제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경직된 관극 문화 개선, ‘컨텐츠’가 답이다

: 극장의 경직된 관극문화는 연극 컨텐츠가 우선적으로 바뀌어야 변화될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에 제도적으로 바뀌기 어려우니 연극이 컨텐츠로써 하나씩 점진적으로 여러 시도를 행한다면 관극 문화도 바뀔 수 있을 것 같다. 창작자와 극장이 어떻게 협의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 그런 시도를 하는 단체들은 보통 대안문화공간을 이용한다. 얼마 전 ‘행화탕’이라는 공간에서 공연을 본 적 있다. 여기는 카페이면서 동시에 전시문화공간이자 공연장으로 활용된다. 2층짜리 주택 건물이었는데, 가령 가족을 테마로 해서 집안에서 일어나는 행동을 퍼포먼스로 그린 공연을 했다. 퍼포머는 앉아서 밥을 먹고, 관객은 그 옆에 서거나 앉아서 퍼포먼스를 본다. 무대와 객석의 물리적 분리가 아예 없는 공간이다.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극장은 무대와 객석이 명확히 나뉘어져 있고, 그 것이 그 안에서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이를 깨고 싶은 창작 단체들은 기존의 극장이 아닌 대안문화공간을 찾는 것 같다.

: <오문오방>이라는 공연도 새로운 관극 방식을 채택했다. 연희문학촌에서 했던 공연이었는데, 특이하게 배우와 관객이 1:1로 만나는 공연이었다. 방이 총 다섯 개고, 윤동주의 방, 김유정의 방. 이상의 방 이런 식으로 방마다 테마가 있었다. 관객 한명이 방 하나에 들어가면 그 안에 배우 한명과 만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공연 1회당 관객 다섯 명만 수용했다. 그 안에서 관객은 배우가 만든 방의 서사를 배우와 함께 직접 느끼고, 감각적으로 소통했다. 새로운 시도였고 관객 반응도 좋았다. 이런 게 바로 연극적인 것 아닌가?

: <무제의 길>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그 작품은 자유로움을 컨셉으로 삼았지만, 어느 정도 룰이 정해져있더라. 실은 자유로움이 컨셉이라고 하니 나도 모르게 그들이 정해놓은 설정을 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관객 개개인이 퍼포머에게 힌트를 얻은 후 답을 찾아 다음 코스로 가야 하는데, 퍼포머에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 말을 걸어보세요’라는 지시 문구가 있기에 코스와 무관한 말을 걸었는데 옆에 있던 스태프가 제지하더라. 자유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공연이었지만 결국 관객들이 의도대로 따라 오길 원했구나 싶었다. ‘자유롭게’ 라는 것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 그 작품은 짜여진 대로 가야 하는 공연이었다. 인터랙션(interaction)마저도 계획에 포함된 공연.

: 인터랙션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객과 상호작용적 측면에서의 인터랙션도 실패했고,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인터랙션 구현도 잘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 그리고 인터랙션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요즘 창작자들은 관객을 걸어 다니게 하는 게 ‘참여’고,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 그건 ‘체험’이 아니라 ‘체현’이다. 관객은 창작자들이 의도한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되는 것이다.

: 현재 공연문화는 극장의 통제 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인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대중들의 연극 유입을 막은 요소 중 하나로 경직된 관극 문화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까?

: 그렇다고 본다. ‘연극이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없다‘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엔터테인먼트라고 한다면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게 컨텐츠 하나만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스티벌 기획이나 음악 축제는 해당 라인업을 보기 위해서 가기 보다는 피크닉을 떠나듯이 간다. 스트레스 풀면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거기서 공연은 내가 즐기는 콘텐츠의 일부일 뿐이다. 먹고 마시고 얘기하는 총체적인 경험 중 하나가 공연인데, 연극은 그 일부가 되려하지 않는다. 연극은 오직 연극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엔터테인먼트가 안 되는 것이다. 연극이 대중화가 안 되는 이유에는 이런 경험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가볍고 쉽게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극장, 모든 연극이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극장, 그런 연극도 있으면 훨씬 대중화되지 않을까.

: 현재 연극 축제도 되게 많다. 서울연극제나 밀양연극제, 서울국제연극제 SPAF 등 그런데 이런 축제들은 스텔라가 말한 축제와 너무 다르다. 나도 그런 대중적 요소를 살렸으면 좋겠다.

: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는 그런 시도가 있지 않나?

: 프린지 페스티벌이 재밌었던 이유가 있었다.

: 프린지 페스티벌이 이번에 시도했던 것 중 하나가 스탬프 찍기 프로그램이다. 공간 디렉터가 전체 프로그램에 스토리를 입히고, 그걸 맵(MAP)으로 만들어 관객이 도장을 찍으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콘텐츠가 있었다. 재미있는 시도였다. 관객의 니즈, 원하는 바가 각각 다르니 여러 시도들을 발굴하려 노력하는 것 같다.

: 나는 극장에 갈 때마다 해당 공연만 보러가는 게 아니라 공연의 앞과 뒤에 즐길 수 있는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술이나 음료를 마시는 것이든, 스탬프를 찍는 일이든, 관객과의 대화를 하든 뭔가 기존의 관극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 공연 한 시간 반을 위해 관객이 시간을 투자해 극장으로 달려가는 것은 엄청난 애정을 쏟는 일이다.

: 극장과 연극의 코디네이팅이 필요한 것 같다. 단일한 작품에서 시도하기는 어려운 것 같은데, 연극제와 같은 축제에서는 가능할 것 같다. 극장 옆에 있는 상권과도 협업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장기적으로 보면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사진 제공 –  Mark Hollow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