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인생이 끝 모를 쳇바퀴에 갇혀 억지로 돌려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염없이 허망하게 끝나기도 한다. 유명인들의 예고 없는 죽음은 늘 삶과 죽음의 지극한 우연성을 돌아보게 만든다. 어제는 배우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날이다.

삶도 죽음도 모두 우연이다. 삶의 존재 이유는 부단히도 고민하지만, 자신의 삶이 시작된 원인을 사유하는 일에는 막연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시작도 뜻밖이지만, 삶의 끝도 별다를 것은 없다. 저 멀리,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삶의 끝자락이 실은 몇 시간 후, 며칠 후, 몇 년 후가 될지 아무도 장담하고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끝이 지난하고도 아득하게만 느낀다. 끝 모를 일상은 우리의 목을 옥죄어 오는 굴레 같다.

이렇듯 지난한 일상을 치밀하게 묘사한 극 하나가 지난 29일 폐막했다.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이다. 제목부터 질박하기 그지없는 이 연극은 사소한 일상을 치열하게 그려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연극을 통해 평범함을 전시한다. 전시는 특별함 혹은 예외라는 범주에 속하는 존재만이 포함되는 영역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평범한 것들이 ‘연극’을 통해 관객들의 눈에 투영됐을 때, 우리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재건축이 논의 중인 낡은 빌라. 이곳에는 권태로운 일상의 반복을 버텨내고 있는 여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15가구 정도가 한 지붕 아래 거주하며 가족과 이웃의 경계를 넘나든다. 단란하거나 수더분한 관계들이 이곳저곳 너부러져 있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이곳은 가장 정치적인 곳이다. 재건축이라는 큰 이슈를 가지고 얽히고설킨 다양한 이해관계들. 작가 장우재는 이 관계들을 소탈하지만 면밀하게 그려낸다.

영화를 몇 편 찍었으나 마땅한 벌이 없이 가족에게 얹혀 지내는 현태, 수년 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현수, 억척스러운 성격으로 빌라 전체를 누비고 다니는 현자,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늘 바쁘게 사는 시간강사 지영, 주민 센터에 근무하며 적당한 친절함을 베풀며 사는 주희, 그리고 옥상 밭에서 고추를 기르며 혼자 사는 광자까지. 무대 위에서 늘 예외적 존재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이번 무대에서는 평범하고 예사로운 인물을 맡았다. 이 인물들은 배정된 이름을 지우고 우리 주변인 혹은 내 이름을 걸어도 괜찮을 만큼 범상하게 그려졌다. 또한 앞서 언급된 배역들 말고도 현자를 따라 동네를 주름잡는 할머니들, 택시 기사들, 고추 밭 사건 시위를 위해 뭉친 열혈 청년들까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채로운 일상적 인물들을 모두 무대 위로 호명한다. 무대는 왜 평범한 인물들을 불러내 예사로운 일상을 보여줄까.

작가 장우재는 연극 개막 이전부터 “가장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트라 켈리(Petra Kelly)의 말에 영향을 받아 이 작품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서사 전개를 위해 택한 결정적 사건은 ‘옥상 위 고추 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극 초반, 현자는 옥상에서 광자가 키우던 고추를 수십 개씩 따다가 광자에게 들키자 “도둑 년”, “서방도 없이 혼자 사는 개 같은 년”이라며 욕설을 퍼붓는다. 광자는 혈압이 올라 쓰러진다. 사건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동교와 간접적으로 목격한 현태는 억울하게 당한 광자를 위해 현자와 ‘싸우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광자를 위해서 싸우기로 결정한 것일까? 동교와 현태는 청년 몇몇을 불러 모아, 빌라 옥상에서 모두가 따갈 수 있도록 애써서 고추를 길렀던 광자가 현자에게 모욕을 당했고 그 충격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린 후 빌라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광자 아주머니에게 사과하라’는 것이다. 사실 현태가 현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벌이는 언행은 사회를 향한 그의 분노와 맞닿아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여서만 살인이 아니라 그 사람 뿌리를 흔들어 버리면 그것도 살인”이라 말한다. 그가 피해자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상처들을 아는 이유는, 그가 최근 영화 현장에서 그렇게 소모되고 버려져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태는 독립영화 함께 찍던 감독에게 성인영화 출연 제의를 받고, 오디션과 미팅 후 캐스팅된 영화에서 인지도 높은 다른 배우에게 역할을 한 순간에 빼앗겨 버린 경험이 있다. 그에게 영화는 ‘사는 재미’였지만, 일련의 부조리한 사건들을 겪으며 ‘어느 순간 더러워진’ 것으로 여기게 됐다. 현자가 끈질기게 사과하지 않자, 시위 기간이 길어진다. 함께 시위하던 청년들은 시들해진다. 이때 현태는 극단적인 일을 실천한다. 인터넷에 현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인신공격성 발언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현태는 억울한 광자를 위해 시위를 시작했지만, 비슷하게 사회에 짓밟혀 본 경험이 이입되어 어느 새 사회에 대한 울분을 현자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극 초반 맹렬했던 현태의 기세는 광자의 죽음 이후 잠잠해진다. 사과를 받아야 할 광자가 죽자, 사과라는 행위가 무의미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교는 최소한 현자가 광자의 마음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혼을 앞두고 사회에 흡수되기를 거부한 동교는 겉보기에 꽤 무기력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옥상 밭 고추 사건에는 흡수되고 나중에는 적극적이게 된 이유, 필자는 그것을 ‘그깟 고추’ 때문이라 생각한다. 동교는 ‘그깟’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행정 실수를 저질렀던 경험으로 사회와 본인을 단절시켰던 동교는, 타인이 납득할 수 없는 사소한 일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중대한 일일 수 있는지 겪어본 사람이다. 왜 ‘그깟 행정 실수’로 사회의 낙오자처럼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는 “사람을 죽여서만 살인이 아니라 그 사람 뿌리를 흔들어 버리면 그것도 살인”이라는 현태의 말로 답변하고 싶었던 사람이지 않을까. 그는 이후 현자가 아끼는 반려견을 숨긴 후 현자의 사과를 곧바로 받아낸다. 그러나 동교는 돌려줄 수 없다. 반려견을 풀어줬기 때문이다.

연극 ‘햇빛샤워’의 동교의 얼굴이 ‘옥상 밭 고추는 왜’의 동교의 얼굴에 드리워진다. ‘관계없음(無關)’이 생의 목표였던 ‘햇빛샤워’의 동교. 그는 세상에 우연하게 버려진 존재였고, 그 또한 세상과 관계 맺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를 유지해갔지만, 다양한 관계망에 얽혀버리자 삶을 중단시킨다. ‘옥상 밭 고추는 왜’의 중년의 동교도 삶의 끝없는 굴레가 버거웠다. 끊어내고자 해도 끊어질 수 없는 것들. 헝클어진 실타래가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자, 그 또한 극으로 치닫는다. 광자의 반려견을 분신 삼아 세상에 풀어버리는 것이다. 동교는 광자의 반려견 하니에게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말라’며 풀어준다.

한편, 이 사건의 발단이 된 현자는 극 초반에는 악질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를 악역이라 부를 수 없다. 현자는 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간 세상을 살아온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에게 현태와 동교, 광자는 ‘별 것도 아닌 것’들이자 ‘별 것’들이다. 자신이 세상을 버텨온 삶의 노력에 비해 하찮은 노력 혹은 무력으로 살아온 이들이기도 하고, 현자의 논리에서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게, 혹은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현자는 광자가 빌라 신축에 동의하지 않고, 옥상에서 퇴비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게 못마땅하다.

“지금 이만큼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 죽자고 여상 나와서 경리부터 주산 부기. 잘 살아보려고 옆도 안 보고 살았어. 누구 덕에 올림픽하고 누구 덕에 아이엠에프 넘겼는데 근데 남는 게 하나도 없어. 그 놈에 주식. 김대중 사기꾼 놈에 새끼.”

현자는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1997년 IMF 외환위기, 1999년 대우 그룹 해체 등 스스로를 국가의 경제와 대소사의 주역으로 억세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의 ‘악착같음’은 인생 내내 그가 살기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지켜왔던 삶의 신념에서 파생된 성질이었다. 옆은 안 보고 앞만 보며 부지런히 살아왔다던 그의 눈에는, 별일 아닌 일에 죽은 사람과 별일 아닌 일에 죽자 살자 덤벼드는 이들이 “진짜 노력한 사람들한테 기대서 살려” 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현자가 악독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깟 고추 때문에 사람이 이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게 사람”이라 외쳤던 동교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깟’ 사소하고도 하찮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이다.

세종M씨어터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 23명의 배우를 등장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5가구 이상의 다가구 주택을 구현하는 일은 막막한 일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무대는 실제 여느 동네에서든 만나기 쉬운 다가구 주택의 일상을 세밀하게 구현했다. 빌라 앞 벤치에 앉아계신 여러 할머니들, 매일 아침 주차장에서 벌이는 주민들 간 실랑이 등 크고 작은 일상들이 부대끼며 살고 있는 某빌라.

현태는 301호, 현자는 201호, 동교는 303호에 산다. 무대 위에 그 집의 내부가 공개된 곳은 단 세 가구이다. 연극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세 가구의 구성이었다. 한정된 무대 공간에서 빌라를 구현하는 일이 녹록한 일은 아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현자는 2층, 현태-동교-광자는 3층에 사는 사람들이다. 무대에서 동교-현태-현자의 집을 나란히 구성하기보다는 분리 구성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구의 배치는 관객들에게 가시적으로 이들의 관계를 표현하기에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현태(301호)와 동교(303호)가 광자(304호)와 같은 층에 살고 있기에 이들이 광자의 상황에 이입하기 쉬웠다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자의 삶의 논리, 그리고 그가 대변하고 있는 사회의 논리에 대립하고 있는 이들을 현자의 집과 분리해 배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력이 자꾸 머리를 맴돈다.

(사진 제공 – 세종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