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기존의 ‘전통적인’ 극장에서 벗어나 공연을 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극단 마고의 <마주.선.아이>도 무대와 객석으로 이뤄진 극장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공간인 탈영역 우정국에서 공연했다. 과거 우체국이었던 이 장소는 현재 연극, 퍼포먼스, 전시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기존의 극장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의 예술 활동도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곤 한다. 그래서 공연 공간이 ‘탈영역 우정국’이라고 하면 괜한 기대감에 사로잡힌다. 극단 마고도 <마주.선.아이>를 홍보하며 ‘탈영역 우정국’에서 하는 ‘움직이는 전시’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홍보를 통해 강조한 세 가지 키워드, ‘고전 <햄릿>에 대한 재해석’과 ‘탈영역 우정국’, ‘움직이는 전시’는 아쉽게도 실제 공연과 전혀 융화되지 못한 채 소비되고 말았다.

철저히 분리된 ‘움직이는 전시’와 ‘공연’

이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전시 공연을 위해 다양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탈영역 우정국을 선택”하였다고 밝혔다(극단 마고의 페이스북 페이지 참고). 의도한 것처럼, 공연은 무대로 쓰이는 공간 외에도 건물의 지하실, 화장실, 옥상까지 여러 공간을 활용했다. 하지만 그것이 본 공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크게 상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필요한 사족에 불과했다.

전체적으로는 움직이는 ‘전시’ 부분과 본격적인 ‘공연’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움직이는 전시부터 살펴보겠다. 전시는 총 여섯 공간에서 행해졌다. (1) 첫째는 사과가 가득 쌓인 나무 박스가 놓인 ‘옥상 공간’이다. 배우들은 나무 박스의 둘레를 다양한 색의 테이프로 휘감는다. (2) 둘째는 ‘책상 위의 공간’에서 두 사람이 상자 뺏고 빼앗아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다. (3) 셋째는 ‘텅 빈 공간’에 갇힌 한 남성이 창문에 목을 메달아 죽는 사람의 그림을 그리고 자신도 끈으로 목을 매는 장면이다. (4) 네 번째 공간은 ‘미디어의 방’으로 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양한 사회의 문제점을 다룬 신문 기사들을 창문과 벽과 거울에 적어 놓았을 뿐이다. (5) 다섯 번째는 ‘화장실’이며, 한 사람이 화장실을 두리번거리고 변기에 화장지를 수북이 쌓는 장면이다. (6) 여섯 번째는 ‘지하실’이다. 여기서 두 남녀는 옷을 입고, 벗고, 바꿔 입다. 이 여섯 개의 ‘전시’는 15분간 반복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자유로이 장소를 이동하면서 위의 전시를 관람한다.

잠시 후 공연 시간이 임박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관객들과 배우들은 건물의 옥상으로 모이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15분 동안 이뤄진 움직이는 전시와 큰 연관성 없이, 따로 진행된다. 즉, 전시는 전시대로, 공연은 공연대로 너무나도 철저히 분리된다.

이분화를 탈피하기 위한 시도

전시가 끝나고, 광대역의 배우는 옥상에서 이동형 리프트를 타고 건물의 가장 높은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전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한 왕국에 행복하게 행복하게 살았던 한 아이가 있었으니. 아이의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다.”고 하며 <햄릿>의 시작을 알린다. 나머지 배우들은 도시의 시민이 되어 선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통곡한다. 관객들 역시 이들의 틈에 끼여 도시의 시민이 된다. 곧이어 배우들이 건네는 국화꽃을 받은 관객들은 장례행렬의 참여자가 되어 1층으로 내려간다. 화로 앞에 국화꽃을 놓고 애도하도록 인도받는다. 그런 후에 관객과 배우는 모두 무대가 마련된 공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다.

공연은 원작의 연대기적인 인과구조를 해체하여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에피소드화 시켰다. 거트루트, 클로디어스, 오필리어와 레어티스, 폴로니우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각각 파편화된 장면은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광대가 매개해준다. 특히 광대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각 장면의 마지막 대사로 끝맺는다.

그런데 광대의 “그것의 문제로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만을 다루지 않는다. 커트루트는 선함과 악함을, 클로디어스는 성공과 실패를, 오필리어와 레어티스는 남자와 여자를, 폴로니우스는 깨끗함과 더러움의 경계를 상징하고 있다. <마주.선.아이>는 <햄릿>으로부터 ‘이분화된 사고’로 사회를 규정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한다. 이분화된 사고를 탈피하고자 하는 이들의 새로운 관점은 원작 <햄릿>에 대한 해석도 변화시킨다.

예컨대 ‘햄릿’의 관점에서 거트루트는 추악한 여인이지만, 이들 작품에서 거트루트는 ‘선한 딸, 선한 아내, 선한 엄마, 선한 왕비’가 되기를 강요받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그녀에게 코르셋을 입힘으로써 명확하게 시각화한다. 클로디어스도 마찬가지이다. 원작의 클로디어스가 선왕에 대한 질투심으로 선왕을 살해한 것이라면, 이 작품에서의 클로디어스는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죽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장면에서의 코러스들은 “취직은 했니? 사람구실은 하고 살아야지”, “어디 회사?”, “연봉이 얼만데?”, “살 좀 빼자”, “성형을 하든가” 등의 대사를 외치며, 경쟁사회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로써 클로디어스는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으로 그려진다. 이 장면은 사다리를 활용해 형상화한다. 오필리어와 레어티스는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여자와 남자에게 가하는 사회적 기준을 지적하며, 태어날 때부터 1과 2로 규정되는 우리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왜’ 그런 기준이 적용되는지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여자와 남자라는 이름에 갇혀 있음을 지적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결코 신뢰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폴로니우스의 장면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콤플렉스를 가진 인간으로 그려진다. 어린 시절, “넌 왜 엄마아빠가 없어?”. “넌 왜 똑같은 신발만 신어?”, “넌 왜 얼굴이 까매? 더러워”, “천한 거랑은 친구 하는 거 아니야” 등의 말을 듣고 자란 폴로니우스는 강박적으로 깨끗함에 집착한다. 그는 새하얀 방역작업복과 마스크를 의상으로 입고 등장한다. 주변의 비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폴로니우스는 “더러운 것은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하는 것”을 살아남는 방식으로 터득한다.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가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를 짓밟는 현재의 폴로니우스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각각의 장면들에서 원작 <햄릿>의 인물들은 모두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 광대는 과거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며 매 장면의 끝에서 말한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남과 여, 깨끗함과 더러움. 바로 그것이 문제라고.

‘아이’와 ‘사과’의 숨겨진 의미

그런데 독특한 것은 공연 내내 원작에서의 주인공인 ‘햄릿’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대는 햄릿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그저 ‘아이’라고 부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선왕의 유령이 나타나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죽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햄릿이 그 진위여부의 옳고 그름 사이에서 고뇌했다. 원작의 햄릿을 아이로 부르는 것은 이분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간을 어린 아이로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 ‘아이’는 곧 관객 내면의 ‘나’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이(child)’는 햄릿이 아니라 또 다른 ‘나(I)’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거트루트, 클로디어스, 오필리어와 레어티스, 폴로니어스, 햄릿’은 죽었다고 말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규정되는 이분법적 사고, 단 하나의 옳은 것만 존재하는 전근대적인 가치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공연은 과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보여주고, 광대는 관객들에게 ‘햄릿은 오직 그대 안에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모든 판단은 관객의 선택으로 남겨진다.

흥미로운 것은 관객들의 선택을 끝까지 시험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공연은 움직이는 전시에서부터 뜻을 알 수 없는 ‘사과’가 존재했었다. 옥상 위에 놓여있던 사과가 가득 쌓인 박스와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에게 나누어줬던 사과 주스와 애플파이 과자 등 계속 ‘사과’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의미 없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남과 여자에 대한 사회적 규범은 ‘사과’가 상징해주는 것이다.

사과의 모티브는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한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인 사과를 따 먹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끄러움을 알게 됐고,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됐고, 그들에게 불행이 시작되었다. 하나의 기준은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마주.선.아이>는 관객 내면의 이분법적 사고를 마주하게 하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하게 만들면서, 공연이 끝난 후 ‘사과 주스와 애플파이’를 건넨다. 잘못을 인식하게 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극의 원인을 알고도 또 다시 그 함정에 빠져버리는 인간의 오만함을 간파하고 있다.

극단 마고가 <마주.선.아이>를 통해 <햄릿> 시대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한 움직이는 전시의 한 공간이었던 ‘미디어 방’에 썼던 현대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공연에 적용하여 풀어낸 점 또한 탁월했다. 산만해질 수 있는 주제들은 ‘이분화된 사고의 해체’라는 큰 주제로 묶음으로써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사과’에 숨겨진 재기발랄한 의미와 함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관객으로서는 아주 큰 재미요소였다. 그러나 ‘탈영역 우정국’, ‘움직이는 전시’, ‘햄릿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문구는 공연과 밀접한 관련이 없어 여전히 아쉽다. <마주.선.아이>는 굳이 그들이 강조한 홍보성 문구들이 없어도 이미 충분한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박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