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2015 SPAF의 최고 기대작이었던 <셰익스피어 소네트>(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가 떠오른다. 셰익스피어 소네트, 로버트 윌슨 연출, 극단 베를린 앙상블이 모였으니 얼마나 대단할까! 그래서였을까, 표현미학의 수작이었지만 기대만큼의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번은 어떨까? 1세대 일본 연극운동의 기린아 테라야마 슈지, 신주쿠 양산박의 김수진, 고선웅의 극공작소 마방진이란 이름이 모였기 때문이다. 기대컨대, 테라야마 슈지와 김수진이라면 극장을 뛰쳐나가지 않을까. 한국 극장 현실의 문제였던 건지, 혹은 테라야마 슈지 소개에 너무 충실했던 것인지, 과도한 양보와 배려였던 것인지, 이번 작품은 기록으로 만난 일본 연극의 신화, 테라야마 슈지에 비해 얌전해 보였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테라야마 슈지를 “마약”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가 통념적 가치관을 뒤엎은 까닭은 당대 도덕에 내장된 불순한 음모를 꿰뚫어 투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그가 환생해서 한국의 통념적 가치관을 뒤엎어야 한다면 한국연극이 가지고 있는 ‘한국사 콤플렉스’가 아닐까?

엄마 아빠를 총으로 빵!  

자, 지옥 순방이다

텅 빈 이 세상

지옥 순방 이외에 뭐가 있겠느냐

                      

자, 다 같이 가자. 전쟁터로.

무대 위에는 다섯 개의 계단이 놓인 단이 있고 악기가 도열해있다. 단 뒤에는 긴 휘장이 무대 천장부터 늘어져 있는데, 좌측부터 검은색, 흰색,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즉 오방색이다. 단 위에 도열해 있는 악기들(신디사이저, 북, 거문고 등)도 음양오행의 철학을 따서 배열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단 위에는 신디사이저나 컴퓨터가 있고, 북, 태평소 거문고 등이 있다. 국악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는 찰나에, 아코디언 소녀가 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한다. 뒤이어 나온 악사들은 소녀를 따라 서정적인 멜로디를 쌓아 올리는데, 마치 오페라의 서곡처럼 공연의 막을 음악으로 연다. 객석 사방에서 스트라이프 장막을 둘러 입은 출연진이 등장해 “희망의 나라”를 노래한다. 음, 평화로운 시작. 그 때! 무대 위로 전쟁의 소리와 불빛이 쏟아진다.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이다.

<시대는 서커스의 코끼리를 타고>는 6장의 에피소드와 4명의 여성(사건)이 모여 이야기를 쌓아간다. 아메리카(1. 영어를 공부하자)→자본주의 시대의 매체 속 여성상(2. 다 같이 진 할로우를 간질이자)→한미상호방위조약의 수혜와 폐해(3. fuck are you 16(우리들은 전쟁에 나가고 싶다), 4. 아아, 슬픈 서부극은)→행복론(5. 풋볼의 규칙에 의한 [행복론] 실험)→반 아메리카(6. 연설, 그리고 고독의 외침)로 이어지는 과정은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의 허상과 전쟁의 실체를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당사자, 여자들의 모놀로그가 교차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한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수혜자는 없다. 누구나 피해예정자다.

이야기 중간 삽입된 여자들의 서사는 한국사 콤플렉스를 내재한다. 오빠의 손에 팔리고, 미군에 의해 유린당한 사연을 가진 여자들은, 외세의 손에 팔리고, 국제정세에 의해 난도질당한 한국이다. 그동안 한국사는 한국연극 속에서 늘 비분강개하고, 애이불비해왔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뜨거운 눈물”로 대표되는 한국연극의 정서는 <시대는 서커스의 코끼리를 타고>에 없다. 오빠 손에 의해 양공주로 팔린 에레나는 진 할로우가 박힌 손거울을 보며 미국이라는 희망을 꿈꾸고, 시크릿 걸 숙희는 오빠의 총을 맞기 전까지 할 말을 내뱉는다. 미군 이등병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당한 윤금이는 자신의 사건 기록을 또랑또랑 읽는다. 그녀의 사건은 sofa 개정에 대한 시위를 이끌어냈다. 우리는 슬프다고 울지만은 않는다. 발칙하게 일어서서 외치는 것이다. “뻐킹 아메리카!” 선생과 학생은 담배를 나눠 피며 사회라는 지옥을 순방하고, 돌아온 아들은 자신의 부모를 총으로 쏴버릴 수 있다. 한국사 콤플렉스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에 쾌감이 몰려온다.

인류가 마지막으로 걸리는 병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병이다.

제자리가 없는 불온의 조짐들

국악 구성의 밴드는 미국 음악인 재즈나 자본주의 음악인 랩, 대중가요를 연주한다. 나는 이 부분을 불온의 조짐으로 보았다. 쾌활하고 독특한 음색으로 대취타나 야외 공연에서 주로 쓰이는 태평소가 서곡의 멜로디를 연주할 때, “Trump. Obama. Bush. Bush!”를 추임새로 쓰는 랩이 나올 때, 검은 선글라스의 DJ가 컴퓨터로 DJing을 할 때, 타이트한 의상에 진한 메이크업을 한 소리꾼이 소리와 스캣 사이의 구음을 내지를 때 음악은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 기존 질서를 단번에 새로 세우는 작업.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과로 보여줘야 하는데, 나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이 음악은 국악이 아니다. 동시대 음악이다.

한편, 일상적인 사물들은 제자리에 있지 않는다. 난데없이 소환당하는 진 할로우는 급기야 태극기를 드레스처럼 휘감고 잠들어버린다. 태극기가 저렇게 쓰여도 되나 싶을 정도로 뜨끔했는데, 나중에 스크린 속 태극기는 무채색으로, 붉은색으로 자신의 색을 잃어가면서 품위를 잃기도 한다. 극 내내 코카콜라의 나라, 킹콩의 나라, 할리우드의 나라인 미국을 향해 반감을 비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만 체결한 것이 아니다. 상호관계 속에서 한국 또한 비판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몇 마디 말보다 태극기의 방정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품위 잃은 태극기는 한국인의 자조이다.

아, 하나 더 있다. 배우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올라가는 위기를 조장하는 파랗고 빨간 조명. 숨겨진 위치가 아닌 무대 위에서 힘차게 오르내리는 조명 또한 신선했다. 제자리를 지키지 않는 무대 언어들에서 해방감을 읽는 것은 너무 무리한 것일까.

이래도 되는 거야?

<시대는 서커스의 코끼리를 타고>란 공연을 보면서 메모를 했는데, 휘갈겨 쓴 탓에 건질 수 있는 메모가 거의 없다. 그래도 그 중 눈에 띄는 메모가 있었는데, “이래도 되는 거야?”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이것은 표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시를 만난 것은 2014년 11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라는 연극에서였다. 배우 강신일(강신일 분)이 연출 김재엽(정원조 분)에게 연극 출연을 제안받고 대본을 읽는 장면이었다. “김일성 만세” 그때 객석의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주위를 살폈고, 심리적으로 ‘무언가’에게 쫓겼다. “이래도 되는 거야?” 내 안의 검열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언론의 자유가 곧 표현의 자유, 표현의 자유란 바로 창작의 자유라는 주장을 연극실천으로 들은 충격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상상력보다 높이 날 수 있는 새는 없다’

-테라야마 슈지

영화감독이자 시인, 극작가 등 전방위 예술 활동을 한 테라야마 슈지는, 1960년대 일본 앙그라 연극과는 또 다른 연극운동을 일으킨다. 가정을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저서 『가출의 권유』처럼, 연극에서 또한 외부의 시선으로 보며, 일본 실험극 1세대가 이끄는 연극조차 기존의 문법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부정을 또 다시 부정”했다. 테라야마 슈지와 텐조사자키 극단에 대한 기록은 마치 사라진 아틀란티스 같은 전설 같은데, 아마도 지금은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테라야마 슈진의 <시대는 서커스의 코끼리를 타고>에서 김수영과 같은 충격을 느낀다. ‘김일성 만세’와 ‘부모를 향해 총 쏘는 고시낭인’은, 통념적 가치관을 폭로하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한편, 테라야마의 충격은 조금 더 유쾌한데, 이런 식이다. 테라야마 슈지에 대해 궁금해서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라는 책을 구입했는데, 그는 책을 버리라고 한다. 책을 버리라는 책을 산다는 행위를 통해 사유를 전달한다. 하하하, “이래도 되는 거야?”

오랜만에 만난 “이래도 되는 거야?”란 질문이 이 시간까지 나를 깨어있게 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때 이 물음은 나에게 자기검열의 실체를 알려준 물음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명사들의 조합의 충격으로 그동안 만족했던 안일한 자유가 산산조각 났다. 나의 자유는 누가 만드는가?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물음이야말로 타성을 발견하고, 금기에 도전하게 한다. 그리고 불온한 상상력이야말로 무대를 살아있게 한다. <시대는 서커스의 코끼리를 타고>에 대한 “이래도 되는 거야”에 느낌표가 붙는 건, 2017년에도 상상력이란 새를 타고 날아보려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온할지라도. 다시 한 번 믿는다. 표현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창작의 집합체인 연극에서만큼은 “이래도 되는 거야!”라고.

아 참,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자칫 ‘불온한’ 기질이 걱정되어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여론조사 겸 표현의 자유를 홍보할 겸 견해를 물어봤다. 나의 막내 동생은 전형적인 체대생인데, 이 친구와의 대화는 간혹 영감을 주곤 한다.

“‘김일성 만세’란 시가 있어. 이 시를 글에 인용해볼까 하는데 말이야, 괜찮을까?”

“쓰기 나름이지 않을까? 비판적으로…”

“비판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쓰는 거야.”

“뭐 그러든가. 근데 그럼 ‘히틀러 만세’나 ‘이완용 만세’란 시도 있어?”

등골이 오싹했다. 조심해야겠다.

(사진 제공 – 극공작소 마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