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큰 사건을 겪어 말이라도 안 하면 미칠 지경의 상태가 있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다. 나의 일상에 지장을 주는, 차마 고개를 못 돌리겠는,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사건. 반대로 물리적 거리와 시간이 먼 얘기여서, 혹은 매우 일상과 가까워서, 구태여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전쟁이라든지, 분단이라든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관객을 만난 크리에이티브 VaQi(이하 VaQi)의 <워킹 홀리데이>(Walking Holiday)는 우리의 현실과 무척 가깝지만, 캄캄한 등잔 밑에 있어 감각하지 못했던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와 전쟁, 분단의 역사를 극장에 소환했다. 그들은 공연을 위해 DMZ 일대를 걸었고, 공연 중에도 무대 위를 계속 걸었다. 걷고, 또 걷고, 다시 걸으면서 분단에 가까워지려 애쓰고, 그 감각과 기억을 걸음으로써 극장에 풀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VaQi에게도, 관객에게도 분단과 전쟁을 감각하기에 현실은 여전히 멀었다.

총구의 눈과 카메라의 시선으로 본 세계

걷는 배우들을 촬영한 영상이 공연의 출발을 알린다. 그들은 자신이 걸으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다. 영상의 끝 무렵, 무대에 불이 켜지고 여섯 배우들이 무대 뒤편에 일렬로 선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흙으로 덮인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공연 중 VaQi 팀원들이 걷던 공간, DMZ, 산과 강,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 등 여러 형태로 변형된다. (연출가 이경성은 이 공간을 ‘놀이터’라고 부른다. 본 글에서도 편의상 ‘놀이터’로 표현하겠다).

‘놀이터’ 위에는 미니어처들과 오브제들이 놓여있다. 배우 나경민이 카메라를 들고 오브제와 미니어처를 하나씩 클로즈업한다. DMZ 팻말, 운동화, 철모, 대북선전 삐라 등이다. 배우들이 오브제를 하나씩 집어 든다. 마지막으로 총이 남았다. 배우 성수연이 그 총을 집어 들고 무대 앞으로 다가온다. 총구로 천천히 관객을 응시하던 성수연은 사격을 연습하면서 느꼈던 감상으로 여행 서사를 연다. 그에 따르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총구를 통해 보는 세상은 딴판이다. 눈으로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의 배경과 인격을 보게 되는데, 총의 가늠쇠로 볼 때는 그것들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어떤 틀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가 인식하는 세상은 전혀 달라진다. 이 전제는 공연 전반에 깔려있다. 이를 형식적으로 잘 나타낸 것이 카메라의 활용이다. 공연 중 대부분 장면은 영상과 함께 펼쳐진다. 영상은 배우들이 돌아가면서 실시간으로 찍어 송출한다. 주로 ‘놀이터’ 위에 놓인 미니어처와 오브제를 클로즈업하고, 때로는 멀리 선 배우를 비춘다. 카메라의 클로즈업을 통해 바라본 ‘놀이터’는 우리가 미디어에서 접하던 공간과 흡사하다. 전운이 감도는 대한민국이지만, DMZ와 이를 둘러싼 역사, 오늘의 긴박한 정세를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드물다. 대다수는 매체를 통해 전쟁과 분단을 감각한다.

요즘 TV를 켜면 미국 대통령이 “롸켓맨(Rocketman)”을 호명하며 비웃는 장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불바다”를 외치는 조선중앙방송 뉴스 클립, 핵무장을 주장하는 극우 정당 대표의 발언이 연속해 나온다. 실제 벌어진 일을 다룬 뉴스인데도 그게 영화의 한 장면인지, 개그 프로그램의 새 코너인지, 페이크 다큐인지 헷갈린다. 총의 가늠쇠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면 인간이 아닌 표적물로 보이는 것처럼, 미디어의 테두리 안에서 보고 접한 북한, 전쟁, DMZ의 역사는 더 이상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우리가 여태껏 보아온 DMZ와 전쟁, 북한은 미디어가 그려낸 괴물의 형상이었다.

이를 고발하듯, <워킹 홀리데이>는 카메라로 비춘 영상과 무대 위 배우의 몸을 병치한다. 관객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장면과 영상에 투사된 대상을 번갈아 보게 된다. 배우의 몸은 미디어가 만든 환상과 대조되는 실재다. 몸은 매체의 매끄러운 감각과 경쟁한다. 늘 봐오던 영상의 이미지와 그 앞의 ‘증언하는 몸’ 사이에서 관객은 고민하며 ‘진짜’를 탐색한다. <워킹 홀리데이>는 미디어로 접한 현실 너머의 세계, 분명히 실재하는 DMZ와 분단의 고통을 복원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모순의 세계에서 벌어진 성스러운 전쟁

기억과 감각의 복원을 위한 몸부림의 수단은 ‘걷기’였다. 공연 중 배우들이 가장 많이 수행한 것도 ‘걷기’였다. 배우들은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고, 이야기 틈마다 무대와 객석 테두리를 이어 걷는다. 걷기를 통해 감각한 DMZ를 걷기로써 무대에 풀어놓는다. 공연 제목이 암시하듯, DMZ보단 ‘걷기’가 더 돋보였다.

‘걷기’를 통해 복원한 이야기는 사적이면서 공적이고, 과거이면서 오늘의 이야기인 겹겹의 모양새였다. 중층으로 전개하는 이야기는 모순적인 세계를 마주하게 했다. 연극은 전반적으로 모순적인 상황, 이중적인 인식, 양가적인 감정으로 휘감겨 있었다. 공연 중 DMZ에 미군이 헬기로 뿌린 지뢰 이야기, 486년 동안 제거해야 사라질 정도의 미확인 지뢰가 아직도 매설되어 있기 때문에 ‘비’무장지대는 사실 ‘더’무장지대라며 명칭에 담긴 모순을 비꼰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워킹 홀리데이>(Walking Holiday)의 ‘워킹’은 원래 통용하던 의미의 ‘일하기(working)’를 ‘걷기(walking)’로 슬그머니 바꾼 언어유희다. ‘워킹’이 걷기라면, ‘홀리데이’는 무엇일까. 직역하자면 휴일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일상에서 벗어난 여정’을 의미할까, ‘휴전 중인 날’을 축약한 뜻일까. 여러 의미를 자아내면서 패러디까지 함축한 제목이다. ‘홀리데이(holiday)’는 ‘성스러운(holy)’ ‘날(day)’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DMZ, 분단 현실과 꽤나 어울리는 단어다. 전쟁 서사에는 ‘성스러움’이 함께 엉켜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쟁을 기억하고 사고하는 방식은 폭력적으로 신성하고, 신성하게 폭력적이다.

프랑스 사상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가 말했듯, ‘폭력과 성스러움’은 매우 밀접하다. 원시 사회부터 인간은 희생 제의를 통해 폭력을 성스럽게 둔갑시켰다. 공동체를 위해서, 더 큰 파국을 막기 위해서, 숭고한 희생의 피가 필요하다는 식의 메커니즘이다. 근대 국가의 형성 이후 오늘날의 폭력은 더욱 고도화되었고 국가, 자본,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성스러움을 부여한다.

분단은 극단적인 폭력과 희생이 만든 역사다. 전쟁은 폭력의 극치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이 쌓은 담론과 신화는 성스럽게 포장되어 있다. 공연 중 배우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도발적인 발언, 반공을 외치는 웅변대회 참가 어린이, 조선중앙방송의 격앙된 언사, 새터민의 증언, 그리고 천만 관객을 달성한 전쟁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을 모방하며 패러디한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성스러움’을 가장했다. 신성한 조국, 성스러운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워 (말) 폭탄을 날리고 대북선전 삐라를 뿌린다(그 와중에 삐라가 보여준 남한의 자랑거리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와 성 상품화, 고작 그것뿐이었다).

이 장면들은 국가가 “순국선열의 피”, “숭고한 희생정신”, “자유민주주의 수호” 등의 수사로 전쟁 서사에 신성함을 부여해왔다는 것을 알게 했다. 이런 수사들은 폭력의 비참함을 거세시킨다. 무고한 희생양의 죽음을 미화하고 정당한 것으로 만든다. 무대 위 ‘놀이터’ 공간의 흙은 수많은 희생양을 덮고 있었다. 배우들이 말했듯이 DMZ 땅에는 군인들, 미군 위안부의 낙태한 아이들, 지뢰가 함께 파묻혀 있다. DMZ는 희생과 폭력이 얽혀 매장된 비참의 땅이다. 그 땅은 바로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이기도 하다.

어느덧 배우들은 객석 맨 뒤편에서 총을 들고 사격 자세를 취한다. 무대 뒷벽엔 사격 표적이 붙어있다. 총은 표적을 향했으나, 그 총알이 날아가는 위치엔 관객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모두가 총알이 지나가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배우들이 표적을 쏜다. 그 와중에 신선우와 성수연은 총 쏘는 법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총을 잘 쏘려면 ‘호흡’을 멈추고 총과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노하우를 전수한다. ‘호흡 멈춤’과 ‘총과 일체’라는 말이 섬뜩하다. 주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총으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배경을 제거하듯, 총을 쏘는 사람 역시 자신을 지워야 한다. 사격하는 사람이든 피격당하는 사람이든, 주체는 필연적으로 상실된다.

총을 쏘는 자와 표적의 아이러니한 관계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은 그들이 직접 표적이 되어 죽는, 혹은 죽음을 연습하는 장면이다. 객석 맨 뒤에서 사격하던 배우들은 이후 각자 표적 앞에 선다. 표적 앞에 선 그들은 공연 초반에 했던 각자의 동작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어느 순간 총성이 들리고 한 명씩 쓰러진다. 잠시 후 다시 일어서고, 수차례 총탄을 맞는다. 사격 연습은 곧 피격 연습임을, 총을 쏘는 자는 결국 피격당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몸과 감각의 증언, VaQi라서 아쉬운

한국 전쟁과 DMZ의 형성은 60년이 더 된 일이다. 시간이 퇴적하면서 그 기억마저 땅에 묻혔다. <워킹 홀리데이>는 그 묻힌 기억들을 몸에 하나씩 덧칠하고 기입하고 내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일종의 기행문이자 ‘증언의 연극’이다. 그러나 그 증언이 객석으로 확장되어 공통의 감각으로 변환되지는 못했다. 300km가량을 걷고 치열하게 리서치 했던 VaQi지만, 분단도 DMZ도 아직 멀게 느껴졌다. 무대 위 배우들도, 객석의 나도 그런 듯했다.

가닿기에 어려운 주제여서 그랬는지 사족이 다소 길었다. 모두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전부 들려줄 필요는 없었다. 특히 배우들이 표적이 되어 죽는, 죽음을 연습하는 장면 이후가 늘어졌다. 그쯤 되면 관객 스스로 충분히 고민하고 감각할 여지가 생겼는데, 마무리를 위해 서사를 정리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도리어 불필요해 보였다.

타인의 고통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몸으로 감각하기에 집중했던 VaQi였는데, <워킹 홀리데이>에서는 ‘이해’와 ‘증언’에 머물렀던 부분이 아쉽다. 보면서 자꾸 전작인 <비포 애프터>(Before After)에서 느꼈던 감각과 비교하게 됐다. 예를 들어 세월호의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감각하기 위해 가까운 죽어가는 아버지의 몸을 감각하고, 그 죽음을 감각하는 나의 몸에 집중하는 것(<비포 애프터>)을 볼 때와, 걷기를 통해 경험한 것을 “총성이 들렸다”, “무서웠다”는 말로 뱉는 것(<워킹 홀리데이>)을 들을 때의 감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타 창작집단의 작품이었다면 이 정도에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VaQi라서 더 미련이 남는다. 미끄러지는 감각의 파편을 지켜보면서, 객석에 있는 나도 그들과 함께 걷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는 공연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는 나 자신도 이 이슈에 너무 무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공연은 아직 걷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본다.

(사진 제공 –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