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관객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많은 이론가들이 주장했고, 여러 실천가들 역시 관객에게 자유를 주지 않으면 연극은 점차 외면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듯하다. 연출가나 작가, 배우들은 관객의 자유를 빼앗을 ‘의무’가 더 이상 없다. 즉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의도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관객은 예술작품을 보고 자신만의 해석을 발견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혹자는 관객의 소양이 부족하여 ‘고품격’의 연극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능력과 가능성이 풍부하다. 관객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수용자를 넘어 하나의, 또 다른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미 영화에서는 관객에게 여지를 남겨두는 방식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여러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특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이 결말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0년에 개봉된 <인셉션>은 아직까지 결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이 논란은 온라인상에 수많은 ‘무명의 비평가들’을 낳았다. 무명의 비평가들 각자의 해석은 꽤나 그럴듯하고 설득력을 지닌다. <인셉션>에 한해서는 권위 있는 유명한 비평가의 관점과 시선이 무의미하다. 하나의 정답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가 관객의 지각방식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니, 작품의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 더. 관객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은 관객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에도 커다란 혐의가 있다는 사실 역시 절감하게 된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두 편에서 ‘논란’이 될 만 한 두 가지 주제를 뽑아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을 공연했다. <다크나이트>에서는 “영웅”을 <인셉션>에서는 “꿈”을 가져왔다. 연출의 말에 따르면 “‘영웅과 꿈’에 내포된 인간의 심리를 들춰보기” 위해 이 두 영화를 선택했다고 한다. 너무 매력적인 연극의 소재가 아닌가? 게다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을 무대 위에 배우들의 신체언어로 풀어내겠다고 하니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연 중 영화 <인셉션>의 장면을 설명해주던, 아리아드네 역할을 맡은 배우의 대사가 필자에게 의심의 싹을 틔게 했다. “다들 이해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배트맨’같은 한 명의 영웅을 원하나요?

주지하다시피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은 <다크나이트>와 <인셉션>을 ‘동시상연’하는 방식을 택한다. 엄밀히 말하면 ‘교차상영’이고, 비유를 하자면 주말 낮 TV에 나오는 <출발! 비디오여행> 속의 코너 “김경식의 영화 대 영화”의 형식을 따른다. 당위성 없이 바뀌는 장면들과 영화 속 명장면들을 선별해서 ‘보여주려는’ 의도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떠올렸던 것이다.

공연은 영화 <다크나이트>의 장면부터, “과연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좋은 질문이었다. <다크나이트>는 고담시(city)의 검사 하비 덴트를 통해 선과 악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선을 대표하는 배트맨과 악을 대표하는 조커 사이, 인간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바로 하비 덴트이다. 그는 영화의 2/3가 넘을 때까지 고담시의 영웅적 검사로서 정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 레이첼을 잃고 악한으로 변하는 순간, 그러니까 그의 얼굴 반쪽이 불에 타서 투 페이스(two face)가 될 때, 비로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에 매료된다.

게다가 영화에서 조커에 의해 “사회실험”에 걸려드는 고담시민들 장면이 나오면 ‘과연 영웅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게 된다.

조커는 고담시의 범죄자들만 태운 배와 시민들만 태운 배를 바다 위에 띄운다. 선량한 시민과 범죄자라는 두 그룹이 형성된다. 그리고 두 배에는 서로의 배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폭장치를 놓아둔다. 조커는 12시까지 한 척의 배도 폭파하지 않으면 두 배는 모두 폭파할 것이라는 경고를 한다. 두 그룹은 고민하고, 투표하고, 서로를 협박한다. 시계바늘이 ‘12’를 향해 움직일수록 긴장감은 더해진다. 그리고 바늘이 ‘12’를 넘어설 때, 그 누구도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순간 수 백 명의 고담시민들은 모두 영웅이 된다. 여기서 과연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인다. 그리고 얻은 답은, 오늘날의 영웅이라 함은 배트맨과 같은 단 한명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익명의 개인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창작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영화를 잘 ‘재현’하고 있던 공연에서 영화에 없던 대사가 들려온다. 새로운 대사를 삽입한 것은 그들이 의도한 메시지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배우들은 관객에게 말한다. ‘역사는 위대한 영웅이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쉽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영웅적 인물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김연아, 박지성을 존경하지만 그들처럼 굳은 살 박힌 발을 원치 않는 것 아니냐’고, ‘평범한 우리가 영웅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공연은 마치 우리가 ‘한 명의 위대한 영웅’을 기다린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이 현대인들의 공통된 심리인 것처럼 만든다. 그런데, 아니다. 일상의 삶을 버티고 살아가는 인간은 모두가 영웅이다. 따라서 적어도 나는 영웅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두가 그렇듯이 이미 나 자신 역시 익명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의도는 랩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강요된다. 사각형 무대의 네 모서리 끝에 선 배우들이 여러 버전의 랩을 한다. 그 중 하나의 랩에서는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고 스스로 “정답은 없다”고 답한다. 그런데 이미 2009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는 정의를 정의하는데 정답이 없다는 것을 ‘명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공연에서 위의 랩은 “지구는 둥급니다, 여러분!”이라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결코 관객들에게 새로운 지각을 열어주지 못한다.

또 다른 랩에서는 ‘가만히 있어라’, ‘제자리에 있는지 질문해봐’ 등 특정 사건을 암시하는 듯한 가사도 나온다. 나는 여기서 일말의 분노의 감정이 일었음을 고백한다. 작품에서 ‘그 사건’을 이렇게 무책임하게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된다. 마치 자신이 정의로운 예술가인양 함부로 소비할 수 있다는 태도가 싫다. 차라리, 아직도 끝까지 들어보지 못한, 치타와 장성환의 “Yellow Ocean”이란 랩을 들려주는 편이 나을 뻔했다. 프로그램 북에는 “젊은 감각의 리듬과 가사는 용기 있는 시선과 감성으로 현실을 논란한다.”며 자신들의 ‘하드코어 랩’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것은 꼰대의 감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꼰대란 무엇인가. 거칠게 말해 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고 그것을 강요하려는 태도가 아닌가? 앞서 살짝 암시했지만, 필자는 연극에서 무명의 비평가들이 활발히 활동하길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성의 연극이 안고 있는 꼰대의 감성과 감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무명의 연극 관객들도 비평가가 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무대에서 활용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배제하고 오직 신체의 언어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목표”(프로그램북 중에서)를 지닌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이 기대되었다. 영화를 그들만의 상상력으로 무대 위에 소환하고, 그것이 또 다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의 저자 존 버거(John Berger)는 책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썼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일찍이 존 버거가 간파한 것처럼 관객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관객은 창작자들의 관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원하고, 그럴 능력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은 관객이 ‘보기’ 전에 ‘말’을 먼저 했다.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은 영화의 장면들을 설명한다. 신체언어가 아니라 ‘말’을 통해서이다. 예컨대 <다크나이트>의 명장면인 트레일러의 전복 장면을 살펴보자. 영화는 이 장면을 특별한 CG없이 만들었다. 공연에서도 이들은 ‘신체효과를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겠다고 말한다. 관객의 기대가 잔뜩 높아진 상태에서 벌어지는 다음의 장면은, 장난감 트레일러와 오토바이를 들고 ‘배우들의 목소리’로만 표현된다. “오직 신체의 언어로 모든 것을 표현”하겠다는 그들의 목표도, 관객에게 불어넣은 기대감도 무너지는 장면연출이었다.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동작들을 ‘어휘’라고 하자. 무용의 경우, 인간의 몸으로 저렇게까지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놀라운 신체 표현 능력을 볼 수 있다. 표현되는 동작은 신체의 ‘풍부한 어휘’이다. 그런 점에서 무용가들의 어휘 구사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크리스토퍼 논란 클럽>에서는 ‘문장’은 있었을지 몰라도 ‘어휘’는 없었다. 배우들이 모두 등장하는 첫 장면이나 배우들의 신체로 배트카를 만드는 장면 등의 앙상블은 좋았다. 아름다웠다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배우들이 보여준 앙상블은 마치 어휘의 조합이 뛰어난 유려한 문장 같았다. 그러나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어휘를 창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심지어 배우 한명 한명은 전체의 앙상블을 위해 이용당하고 혹사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전체 조화를 위해 희생당하는 신체들은 무대 위에 빈틈없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빈틈없는 무대 위의 이미지들은 관객에게 다른 방식으로 볼 권리를 박탈했다. 관객의 권리를 박탈할 때 관객이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는지 한 배우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말하기도 했다. “이제 5분이면 끝입니다. 원래 영화 두 편을 합하면 5시간도 넘는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다섯 문단이면 끝입니다. 조금만 더 읽어주세요.

물론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연극이기 때문에 가능한 상상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여러 의자들을 이어 붙여서 미로를 표현한다든가, 빈 의자를 끌면서 ‘캐리어’로 여기기도 했다. 액자와 TV 화면은 양손으로 사각형을 만들어 확대하는 입체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여러 배우들이 모여서 배트카를 완성시키는 것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관객의 상상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무대 위의 가장 큰 오브제인 배우가 ‘창조적인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연에서 조커를 맡은 배우는 히스레저의 조커를, 배트맨의 배우는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을 똑같이 따라하려고만 했다.

두 영화가 교차하는 공연에서 <인셉션>의 중요한 인물 ‘사이토’와 <다크나이트>의 주인공 ‘배트맨’은 한 명의 배우가 맡았다. 두 캐릭터의 특징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배트맨에서 사이토로의 변화를 훌륭히 소화해냈다면, 그 배우는 무대 위에서 돋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베일이 창조해낸 ‘중저음의 목소리를 지닌 배트맨’을 흉내 내었고, 사이토는 얼굴을 잔뜩 찡그려서 늙은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진지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굳이 주지 않아도 되는 웃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배우로서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그는 날려버렸다.

게다가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장면도 종종 있었다. 예컨대 일본인인 사이토가 말하는 “인셉션”을 굳이 “이노셉션데쓰”로 발음하는 식이다. 또한 <다크나이트>에서 투 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가 고든 경찰청장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인질로 삼는 장면이 있다. 배트맨이 연인이던 레이첼을 왜 죽게 내버려두었느냐고 반문하던 그때, 고든은 손을 뻗으며 말한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고승덕 변호사의 패러디인 것이다.

관객으로서 나는 공연이 던지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나 웃을 때조차 자유롭게 선택하고 싶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관객이고 싶다. 이것이 비단 ‘나’라는 개인의 문제일까? PIL-ZINE이 견지하고 있는 이중의 목적처럼 언젠가 연극에서도 ‘관객은 비평가’가 되고 ‘비평가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방향성이 가장 중요하다. 작품은 무명의 관객들이 지닌 ‘잠재적인’ 비평가의 능력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뿌리 채 뽑힐 이유가 없다.

(사진 제공 –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