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강남역, 독산역, 성수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똑같이 구의역에서도 반복됐다. 두 번을 넘어 세 번, 네 번째 일어난 이 똑같은 비참한 죽음을 우리는 여전히 ‘우연’ 혹은 ‘실수’ 등의 속 편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괜찮을까?”

지난해 5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협력업체 직원 김 모 군이 당한 사고 뉴스를 접한 후, 필자가 되뇌었던 생각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다시 반복됐다. 제주시 모 음료 제조회사에서는 실습생임에도 관리자 없이 홀로 일하던 이 모 학생이 제품 적재기 프레스에 몸이 끼인 사고를 당하고, 지난 19일 숨졌다. 지난 16일에는 안산시 반월공단의 한 플라스틱 제조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박 모 학생이 공장 건물에서 투신해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너무도 흡사한 사건들이 반복됨에도, 우리는 이 각각의 사건을 개인의 불행한 사건으로 치부해버려야 하는 걸까?

이와삼의 관극회원인 필자는 어느 날 이와삼에게서 이런 메일을 받았다. 신작 작업에 참고하기 위하여 ‘나를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고 이 세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했던 경험담’을 공유해달라는 메일이었다. 마침 최장 연휴를 기록했던 지난 추석에도 일하기 위하여 버스에 올랐던 시간에 확인한 메일이었다. 짜증과 환멸은 최근 일상을 잠식하고 있던 정서였다. 분노는 흔했으며, 환멸은 쉬웠다. 쓰고픈 경험담이 한 가득이었다. 그러나 이내 답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나의 분노담과 환멸담 쓰기’는 신나게 시작됐지만, 곧 자기연민의 감정이 벅차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이후 숨조차 ‘턱-‘ 막히게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분노담과 환멸담은 미완성으로 노트북 바탕화면에 저장되었다.

지난 18일부터 26일까지 선돌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신자유주의놀이 – 빈의자’는 나의 불행과 고민, 그리고 우울증이 나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 그간 사회적, 구조적 문제들이 ‘개인의 문제’라는 프레이밍 안에 은둔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연극은 말한다. “너의 고민은 신자유주의랑 관계가 있다”고.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이고’ 있다

연극은 우리의 우울증적 고민들이 ‘신자유주의’와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일상의 비극을 재현한다. 여느 연극배우가 연극 연습보다 지원사업 준비와 행정 절차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사실, 여느 회사 인턴이 국가가 보장하는 최저 노동 대가조차 모두 받을 수 없음에도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사실, 여느 예비부부는 사랑의 완성도를 자본의 척도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 더욱이 비참한 것은 이 모두가 너무나 일상적이고 흔하게 들린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비참한 일상들을 재현하며 또 하나의 사건을 짚어낸다. 지난해 5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를 맡은 협력업체 직원 김 모 군이 당한 사고이다. 당시 사고 이후에는 피해 직원의 과실사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저비용 고효율’을 절대적 명제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과연 ‘저비용’은 누구에게서 요구되는 희생이며, ‘고효율’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이득일까. 저비용을 위하여, 그리고 고효율을 위하여 사회는 하청의 하청의 하청업체를 만들었고, 그렇게 모든 책임은 하청의 하청의 하청업체를 다니고 있는 한 개인에게 전가되었다. 그리고 그 개인은 곧 ‘피해자’이기도 하다.

무대 중앙을 점하고 있는 고스트 체어는 이와삼 트랙B가 ‘신자유주의’를 표상하기 위하여 설정한 오브제이다. 이 빈 의자에는 누구나 와서 앉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 앉는 사람은 바뀔 수 있고, 의자에 앉은 사람은 앉아있는 순간만이라도 자신이 이 의자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다. 언제든 다양한 상황에 따라 자의적, 혹은 타의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사무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의자는 아무렇지 않다. 천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할 정도이다. 이 투명한 의자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앉았다 떠났을까?

한 사람이 떠나면, 그 사람이 있었던 자리가 남는다. 남은 이들은 빈자리를 보며 떠난 이를 떠올린다. 망막한 인생 속에서 섭섭하지 않은 헤어짐을 얼마나 만나볼 수 있을까? 주체적으로 자리를 떠났던 사람을 떠올릴 때면 씁쓸함 대신 모진 그 결심을 책망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곤 하지만, 상황과 타의에 떠밀려 자리를 떠나야 했던 사람을 떠올릴 때면 그 자리가 더욱 서럽다. 남은 이들은 떠난 이를 떠올리며 자신의 자리를 어루만져본다. 이곳을 벗어날 때의 나는 추방의 대상이 아니라 이동의 주체이길 바라는 생각도 떠올려본다.

온전한 타자의 영역에서 당자는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아등바등할수록 의자는 내 둔부를 거부한다. 결국 사람은 의자에게 정수리를 내어준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의 멍에를 지고 가며,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비본질적 현상 자아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의자의 본래 사용 의도를 잃어버렸다. 둔부 밑에 있어야 할 의자가 정수리 위로 올라간 지금, 우리는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가는 중이다.

신자유주의와 직결된 어려움만 엄선한다는 것

하지만 ‘스스로 감당해야 할’ 어려움과 ‘신자유주의로 인한’ 어려움은 철저히 구분해야 했다. 극의 재구성을 맡은 황설하 배우는 프로그램북에서 이 두 지점을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연을 재구성했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고백한다는 것이 자기연민, 자기변명, 자기합리화와 맞닿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공연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관객들은 그런 연극들에 지쳤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와삼 트랙B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불특정 다수가 겪고 있을 다양한 사례를 말한다. 이들의 경험과 사유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연극이기 때문에, 이들의 고민이 생략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연극하는 사람이 왜 연극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냐’라고 불평하는 대신, ‘연극하는 사람이 왜 연극 만드는 일에서조차, 연극 연습 대신 행정 업무에 시달려야 하냐’라고 묻는다. ‘연극인은 왜 빈핍의 상태와 긴밀해야 하냐’라고 따지는 대신, ‘내가 생각하는 가난에도 기준이 있었다’라는 자기고백으로 이어졌다. 연극하는 사람은 연극할 수 없고, 노동자는 노동의 최저 대가조차 받을 수 없고, 자본의 가치로는 치환될 수 없는 것들이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어야 하는 부조리를 지적한다. 신자유주의가 인간과 그의 삶을 어떻게 부수적으로 만드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어려움을, 자기부정 없이 이야기하기 위해 제작 방식의 변화를 시도했다. 트랙B는 날렵하게 변하는 사회에 재빠르게 대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와삼의 프로젝트 그룹이다. 이 그룹의 첫 연극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서사의 세계 대신, 단원들의 경험과 사유를 펼친다. 트랙B는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고발하는 동시에 그것의 굴레에 굴복하고 마는 모순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크라우드 펀딩을 통하여 제작비 일부를 확보했다. 지원사업 의존도를 낮추는 대신 이와삼에 대한 신뢰로 관객들의 후원 비용을 제작비를 충당하는 일, 단원들이 제공한 노동 가치 이하의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것은, 극단 내 빈 의자를 더 양산하지 않는 일과도 직결됐다. 아파서, 부양가족이 생겨서, 작업의 압박감 때문에, 생계가 위협돼서, 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극단을 떠나야 했던 5명의 동료를 기억하는 일, 곧 그들의 빈자리를 ‘빈 의자’로 표상하는 일은 연극인으로서의 힘듦과 신자유주의를 견뎌내는 힘듦을 구분하기 위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내뱉은 첫 마디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알았다 해도 출구는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연극을 만드는 이유는 이들이 배우이자, 연극인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현실을 재현하며, 현실을 사유하는 이들. 그리하여 현실 안에서는 도저히 발견하기 어려웠던 모습을 무대 위에서 밝혀내는 이들.

제작 방식의 변화는 이들의 공연 내용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공연 형식의 변화도 불러왔다. 이들은 직접 취재한 기록을 무대에 드러내는 버바팀 연극을 시도함으로써, 카메라 렌즈의 프레임 또한 하나의 오브제로 사용했다. 프레임이 투영되는 스크린은 관객들의 시선과 사유가 에피소드 자체에 머물지 않고, 어디든 존재하지만 찾아내기 힘든 ‘빈 의자’와 그곳에 앉은 사람을 인식하게 한다. 이에 따라 카메라 렌즈가 비추는 존재는 ‘빈 의자’ 그 자체가 될 때도 있고, 그곳에 앉아 우을증적 자화상을 바라보는 배우들이 되기도 한다.

한편, 극은 실재하는 인물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됐지만, 배우들은 검은 옷을 입고 혹자(或者)를 연기한다. 광준, 은주, 설하 등의 구체적인 역할 이름 대신 관객 본인의 이름, 혹은 주변인의 이름을 넣어 바라봐도 무방하다. 사건을 묘사하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현실을 진술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적인 언어가 새겨져야 할 스탠딩 마이크에는 배우들의 공적인 발화들이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급하게 중단된다. 무대를 격렬히 뛰어다니던 배우들의 가쁜 호흡이 그 남은 언어들을 대신했다. 신뢰를 잃으며 휘발되고 마는 허울뿐인 공적 발화 대신, 마지막까지도 숨 가쁜 일상을 남기고 갔을 故 김 군의 호흡을 이해하는 일이 더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극 중간중간 안무가 밝넝쿨에게 영감을 받은 움직임을 선보인다. 이 움직임은 신자유주의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과정, 그것의 굴레를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의 과정을 표상하는 동시에, 배우들의 그 지난했던 과정을 위로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각각 다른 신체의 생김새로 저마다의 굴곡을 만들어가는 이들은, 각기 다른 고충과 상처를 스케치한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은, 환멸담을 쓰던 필자가 숨이 ‘턱-‘ 막혔던 순간처럼 작업자들의 숨통을 죄는 일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이 연극이 유령 같은 신자유주의를 굳이 실체화하려고 하는 이유는,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구조적 역경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함이다. 개인의 문제가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것이라면, 전체의 문제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빈 의자’를 남겨놓고 나오며

이와삼 트랙B는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알았다 해도 출구는 여의치 않음’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고민은 신자유주의랑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연극을 올렸다. 이들의 발화가 세상을 바꾸지 못할 걸 알고 있음에도, 이야기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배우’와 ‘연극인’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의자를 남겨 놓고 떠난 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극단 내부 세미나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만들어진 이 연극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보다 넓은 담론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한 편의 짧은 연극으로는 다양한 이들의 속 깊은 고민들을 들어볼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기에, 장우재 연출가는 첫 타자를 자신들로 삼았으며 부족한 부분은 관극회원들의 편지로 메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의 얘기가 듣고 싶’다며 관극회원의 편지 두 편을 낭독하며 극을 맺는 이들에게, 우리의 얘기는 어떤 식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연극에 격하게 공감하며 현실의 절벽을 마주한 이들은, 이제 이 절벽을 어떻게 초극해야 하는 것일까? 트랙B는 현대 연극이 지니고 있는 관객과의 소통 단절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며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을까? 이들이 공연하고 떠난 ‘빈무대’에는 이들의 궤도를 향한 의문과 기대감이 남았다.

(사진 제공 – 극단 이와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