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노아의 방주

연극 <오펀스>는 필라델피아 북부에 카맥 스트리트에 위치한 트릿과 필립 형제의 남루한 이층집, 그 안에서 벌어진 2주 남짓한 시간의 이야기이다. 크고 작은 소품의 배치나 조명의 활용을 제외하고는 큰 장소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서사는 고집스럽게 트릿과 해롤드의 집 안에서 이어진다. 이들의 집 안으로 들어온 이상 관객들은 배우들의 눈을 통해서 겨우 집 밖의 상황을 가늠할 뿐이다. 창문 틈으로 겨우 내다본 바깥세상은 알러지로, 폭력과 칼로 대변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집 안이라고 안전한 것 같지는 않다. 형인 트릿은 도둑질을 일삼는다. 더구나 집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조금 모자라 보이는 동생 필립에게 윽박지르는 일뿐이다. 필립이라는 아이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순수하다고만 하기에는 자기만의 세계에 꼭꼭 숨어 산다. 어쩌면 극의 제목인 <오펀스>는 이들에게 주어진 변명일지 모르겠다. 이들이 고아라는 사실. 어릴 적 응당 받아야 했을 부모의 보호 아래 자라지 못해서 조금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들 형제에게는 서로가 있다. 더구나 아직 엄마의 온기가 남은 옷장이 있는 이 집은 적어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단절된 공간이자 유일한 도피처가 되어왔지 않은가.

집 안은 오롯이 트릿의 문법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이다. 사랑과 보호라는 명분하에 트릿은 필립을 숨겨두고 그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글을 익히는 것도 막는다. 사전과 책으로 조금씩 글을 깨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필립은 좀처럼 트릿의 말을 어기는 법이 없다. 사실 필립도 이 생활이 썩 나쁘지는 않다. 비록 필립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신문지를 말아쥐고 윽박지르는 트릿이지만, 그가 열심히 도둑질을 해오는 덕분에 필립은 알러지 걱정 없이 집 안에 머물면서 형이 사 온 마요네즈로 만든 참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으니까. 필립에게 바깥세상은 창밖으로, 브라운관으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트릿의 세상은 필립의 정신적, 신체적 성숙을 막아 왔다는 점에서 분명 폭력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트릿의 세상이야말로 필립에게는 가장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왔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이들 형제에게 집은 곧 안식이다. 형의 신경질을 피해 숨어들 엄마의 옷장도, 도둑질을 하고 숨 가쁘게 숨어들 단 하나의 동생이 있는 공간도 모두 이 허름한 이층집 안에 존재했다. 그래, 적어도 해롤드가 이곳에 머물기 전까지는.

밖, 탈주하는 자아

트릿은 몰랐다. 두둑한 지갑을 가진 이 늙은 신사를 납치한 것이 유일한 자신들만의 안식처에 균열을 내는 일이 될 것이라고는. 트릿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해롤드를 꿰어내어 납치한다. 해롤드의 신체를 겁박하고 몸값을 요구하던 트릿은 해롤드의 총과 돈 앞에 무릎 꿇는다. 해롤드가 두 형제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되면서 두 형제의 생활은 크게 변한다. 빈 참치캔과 마요네즈 병이 굴러다니던 집안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화분과 장식이 놓이기 시작한다. 입성도 달라진다. 끈 풀린 운동화 대신 로퍼를 신고 낡은 집업대신 잘 빠진 수트를 입기 시작한 아이들은 마치 해롤드와 부자지간이라도 된 것처럼 가까워진다. 밖에서 시작된 변화의 싹은 아이들 내면에서도 생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해롤드라는 씨앗이 싹튼 콘크리트처럼 공고해 보이던 아이들의 세상은 차츰 틈을 내며 허물어진다.

특히나 필립에게 해롤드로 인한 변화의 진폭은 더욱 컸다. 해롤드의 격려와 가르침으로 집 안, 트릿의 세계에 갇혀있던 필립의 자아에도 균열이 생긴다. 일상을 가장한 세계에 한 번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그 틈으로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새어 나와 종래에 모든 것은 뒤흔들기 마련이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해롤드가 건네준 지도를 손에 쥐고 문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을 때, 필립은 비로소 시공간의 자오선 위에 서 있는 자신의 존재를 감각한다. 그래서일까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라고 외치는 필립은 필라델피아 북부를 가로질러 사라지는 태양을 닮았다. 필립의 한 발은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다. 이제 더 이상 필립은 자신을 소외에 길 위에 두고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립에게 다시 돌아온 집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공간일 수 없다. 깨달은 자의 눈이라 그러하다.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 불편하게 포착되기 시작할 때 너무나 익숙하던 집도 어느새 안정감과 동시에 불안함을 주는 공간이 된다. 그 기이한 낯섦(Unheimlich)은 불화의 감정이다. 집에 있어도 마치 집을 잃은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일까? 위태롭게 폭주하는 트릿에게 필립은 말한다. 형이 애써 억눌러왔지만, 나에게는 자유가 있다고. 그것을 찾기 위해 이 집을 떠나겠다고. 이렇게 집 밖을 향해서 한 자아의 탈주가 시작된다.

안, 이 또한 사랑이다

트릿 역시 해롤드로 인한 변화와 불화의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트릿과 필립의 세상에 끼어든 해롤드는 트릿의 불안을 자극한다. 해롤드의 카드로 좋은 수트를 빼입고 뻗대며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임무는 주지 않고 격려니 절제니 하는 말로 자꾸 자신을 가르치려 든다. 것도 모자라 해롤드와 가까워지며 변하는 필립의 모습은 트릿의 신경을 긁어댄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해롤드에게 폭발해버린 날, 만취해 해롤드를 죽이겠다며 들어온 집 안에 해롤드도 그리고 필립도 없다. 필립의 부재는 트릿에게는 가장 무서운 일이다. 텅 빈 집안은 어머니를 잃은 그 날과 겹치며 트릿을 공허와 두려움으로 몰아댄다. 그 낯익은 두려움(Unheimlish)이 트릿의 뇌관을 건드린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필립의 목을 조르며 악을 써대는 트릿을 마음 놓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물론 필립의 양 손발을 묶어 통제하려 했던 트릿의 방식은 변명할 여지없는 폭력이다. 하지만 왜곡되었을지언정 그 또한 어찌 사랑이 아니겠는가. 어린 날 부모를 잃고 한순간에 거리로 내던져진 아이.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낙오되거나 살아남는 것뿐이었을 아이가 할 수 있는 불안정하면서도 불가피한 방식의 사랑 말이다.

밖, 또 하나의 구두가 붉게 물들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집 안으로 해롤드가 걸어 들어온다. 붉게 물든 구두를 신고. 문틈 사이로 그가 걸어 들어온 바깥을 내다본다. 바깥, 그러니까 이들이 기거하는 사회의 기본 원리는 자본주의이다. 해롤드가 말하는 경제니 이윤 동기와 같은 것들을 알아듣지 못해도 우리는 안다. 황금의 싯누런 빛깔이 카맥 스트리트를 가로지르는 가로등 불빛보다는 총과 칼의 차가운 금속성과 닮아있다는 것을. 소유와 자유를 기조로 한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교환 가치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해롤드가 트릿을 고용한 것처럼 사람도 쉽게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사회란 말이다. 이것의 맹점은 돈이 최소한의 인간의 기본권마저 손쉽게 박탈할 수 있는 폭력적 구조를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체온을 지켜줄 마지막 신문을 팔아버리고 폐렴으로 죽어버린 프레드에서도 부모를 잃고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트릿에게서도 자본의 폭력은 문득문득 고개를 든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이 자본의 논리는 깊숙하게 스며서 종래에는 그것이 폭력임을 인식하지도 못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체제는 억압이다. 하지만 억압은 억압을 당하는 사람, 더 나아가 억압을 하는 사람조차도 그것이 억압임을 인지하지 못할 때에 가장 완벽하게 작동한다. 우리가 필립에 대한 트릿의 가해는 선명하게 보았지만, 아이들에게 부모를 빼앗은, 트릿을 거리로 내몬, 해롤드가 총을 맞게 만든 것을 ‘세상의 가해’로 선명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이유도 우리가 이미 그 세계를 공고히 구축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해롤드의 죽음은 자본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또 다른 균열의 순간이다. 사실 해롤드야 말로 자본주의의 이면이 키워낸 전형적인 인물이다. 두 형제에게 한없이 자상한 사람이지만 그는 사실 시카고 출신 갱이다. 트릿이 탐내던 그의 재산도 폭력과 야생의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눈감아준 피 묻은 돈으로 축적한 것들이리라. 그는 부패한 자본 그 차체를 표상한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총을 맞은 채 피 흘리는 해롤드의 몸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함에 대한 증언이다. 또한, 트릿이 살아왔던 방식에 대한 변론이고 두 아이가 앞으로 마주치게 될 세상에 대한 증거이자 그럼에도 순수를 정의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안, 안에 있는 자는 결국 밖에 있던 자다

그렇게 오열하는 아이들 사이로 한 세계가 닫힌다. 필립은 피 묻은 헤롤드의 붉은 구두를 벗기고 자신의 로퍼를 신겨준다. 이로써 아이들은 또 하나의 붉은 구두를 가지게 되었다. 이 주 전처럼 다시 두 형제만 남은 집 안. 하지만 그곳은 이전과 다르다. 동생의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트릿이, 자신의 춤을 함께 춰줄 형이 있는 필립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먼 데에서 오지 않는다. 언제나 은신할 수 있는 ‘안’도, 끝까지 외면하기만 할 ‘밖’도 없다. 한 시인의 말처럼 결국 안에 있던 자는 결국 밖에 있던 자이다. 해롤드의 죽음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것은 그것이다.

극의 끝을 알리는 암전이 끝나고 두 형제의 집을 나오며 부야베스를 떠올린다. 한 그릇의 부야베스를 두고 필립에게 해롤드는 이렇게 말한다.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온 각각의 개체들이 정체성을 잃고 해체되어 부야베스가 되었다고, 그것이 필립 너의 뱃속에서 다시 너의 일부가 되는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해롤드는 죽었다. 하지만 어느새 두 형제의 집 안 여기저기에 해롤드는 스며있다. 해롤드의 식어버린 손을 잡고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처럼 우는 트릿에게서, 그런 트릿의 어깨를 두드리는 필립에게서 그렇게 해롤드는 존재한다. 그 따뜻함마저 부야베스를 닮았으니 이것은 기적이라 할 만하다. 그래, 안에 있는 자는 결국 밖에 있던 자인가 보다.

(사진 제공 – 악어 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