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주변에 살아있던 것들을 숨죽이게/사라지게 만드는 것

죽음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것. 슬픔, 외로움, 그리움. 그리고 남겨지게 되는 존재들. 이 공연에서는 남겨진 것들이 가지게 되는 상황들을 나열하며 그 존재들이 가지게 되는 감정과 상태를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국가정책에 의해 무작위로 살인을 감행하게 되는 이야기부터, 모든 사람이 사라진 후에 남겨진 장치 하나의 모습까지, 전인철 연출은 죽음(사라짐)과 그것이 남기고 간 존재에 대한 짧은 8개의 이야기들을 엮어낸다.

미쟝센, 눈앞에 펼쳐진 TV 소극장

관객들이 들어와 자리에 착석하고, 조명이 꺼지기 전까지 주위를 둘러본다. 자그마한 극장에 어스름하게 보이는 프로시니엄 아치. 별다른 생경함 없이, 조명이 꺼질 때까지 앉아서 앞만 보고 있다. 무대에 빛이 들어오니, 내가 봤던 아치는 TV의 프레임으로 보이고, 인물과 사물들이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고 배치된 것을 목격한다. 후방에는 영상물이 투사된다. TV 속의 TV인가? 보는 이와 행동하는 이를 나누는 경계. 그 경계는 분명 존재했지만, 점차 그 경계는 점차 무너져, TV 프레임 안의 우리, 나를 발견한다.

미쟝센. 무대 위 프레임에서 움직이고 배치되는 존재들은 말과 행동들로 공간을 가득 메운다. 각자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나에게 비일상적인 TV 장면처럼 느껴지다가도, 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오는 것들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가득 차오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일어날 법한 가능성을 인지하는 순간, 서늘함마저 느껴진다.

서늘함, 그것을 바라보는 따스한 인간적 시선

홀로 남은 것들은 고독하다.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찾는다. 무언가를 욕망한다. 그들은 조용하게 외친다. “혹시 저 아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홀로 남겨진 것, 홀로 남겨질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서글퍼진다.

그들로부터 미래에 홀로 남겨질 우리를 발견한, 그 감정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처럼 여겨지고,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외로움과 고독함을 마주하는 우리는 안타까움 마저 자아낸다.

그들(배우들)의 말과 행동은 동화를 유발하는 감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냉정하고, 상황 표현에 충실한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간적인 시선이 가득 메워지고, 차가운 공연과 따뜻한 인간적 시선이 이곳에 공존하게끔 만든다.

욕망, 부정하고 싶지만 인정하게 되는 그럴법한 행동

사람은 무언가를 욕망한다. 그 욕망을 드러내기도 숨기기도 하는 것. 삶은 억제와 분출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 억제를 할지, 분출을 할지 판단하고 실행하게 된다.

‘악마’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과 다를 수도 있고, 우리의 상상대로 생기고,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할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악마를 우리가 활용할 수 있다면? 나의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준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적 악마를 무대 위에서 발견함과 동시에 잔혹하고도 솔직한 우리를 마주하게 된다. 한없이 폭력적인 우리의 모습은, 정신적 장애의 형태가 아닌, 멀쩡한 정신으로 나타난다. 사회와 환경 속에서 고통 받은 우리(배우 혹은 나)의 폭력성은 너무나도 그럴듯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만약 폭력의 흔적이 지워지고, 폭력이 용납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라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느낌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나를 발견한다.

1미터 깊이의 구멍에 내가 지우고 싶은 것들을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누군가가 맞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만약 1미터 위의 세상에서 뱉은 침이라면? 세상은 1미터 깊이의 구멍에 버려진 것들로 구성된 쓰레기장이 아닐까. 이 세상은 그렇게 버려진 것들로 구성된 것이 아닐까. 나 또한 그런 존재가 증식한 존재가 아닐까. 나의 어떤 욕망의 배출로 인해 그 어떤 세상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세상은 그렇듯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굴러가고 있다. 내 욕망은 과연 윤리적 기준에 적합하게, 세상을 윤리적으로 굴릴 수 있는 것인가? 나의 욕망은 그럴법하다. 그런데, 타인의 눈에 그 욕망은 과연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질까?

차가운 미래, 고독한 것으로 구성된 철제/플라스틱 월드

과학이 인간의 삶에 다가오고, 앞으로의 삶을 전망시켜줌에 따라 인간은 점차 편안함과 인간 이성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점차 인간의 능력을 증명시켜주는 기계와 가까워지고 있으며, 기계는 점차 발전하여 새로운 단계의 산업혁명까지 만들어내는 등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렇듯 차가운 기계들이 자리 잡는 와중에 그들(기계)에게 있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인간성이라는 것 또한 투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결국 인간이 만든 그들은 차가우면서도 인간적일 수 있는 아이러니를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기계도 외롭다. 그리고 기계도 실수를 한다. 그리고 기계 또한 유한한 존재다. 그리고 기계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과 닮아있다. 그렇듯 기계의 삶은 우리 인간의 삶에 투영된 듯 외롭기도 하고, 차갑게 남겨진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저미기도 한다.

차갑게 그려지고, 딱딱하게 그려지는 기계 장치들을 보면서 우리는 차갑게 얼어버리고 딱딱해져 버린 일상을 느끼기도 한다. 기계, 로봇을 보면서 매력을 느끼는 인간들을 비롯하여, 필요에 의해서 버려지는 기계의 삶, 무가치함을 열심히 생성해내어 세상의 끝에 남겨놓는 처절함. 그리고 하늘에 떠다니는 인간의 흔적을 무대 위의 미쟝센으로 느끼는 순간 우리가 바라보는 착잡한 세상에 대한 시선은 점차 따스해져만 간다.

아마, 그 시선은 굳어버린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을 비롯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인간적 행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현실 가능성이 높은 비현실을 보는 내내 관객들은 숨 가쁘도록 차갑게 펼쳐지는 미쟝센을 가슴속에 담아둔다.

데드라인, 쉼 없이 달려가는 이유

사라지는 것이란 자고로 유한성을 담보로 하여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라는 협박을 자아내는 특성이다. 삶이 시작되어 죽음이라는 곳으로 열심히 전진하는 와중에, 어떤 삶은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지독한 집착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 그 과정은 찬란하기도 하지만, 비참하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다. 무슨 뜻이냐? 나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들도 모른다. 인생을 의미 짓는 것이란 이렇듯 우리가 강요받고 있는 하나의 의무 같은 것이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 그 상태를 바라보는 것의 의미를 찾게 되는 무대.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의 죽임이 아닌, 이 공연에서의 죽음과 사라짐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삶의 표상들을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의미를 떠나서, 솔직하게 무얼 원하며 살아가는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차가운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차가울 수 없었다. 인간이 아닌 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인간다운 상태였다. 솔직했다. 가까우면서도 먼 미래를 동시에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시간보다도 현재의 삶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 고민과 문제는 닮아있었다.

나가며

극장을 나가는 길은 공연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정리하는 과정이다. 이번 무대를 보면서 느낀 바를 정리하는 과정은 러닝타임 동안에 수행되었던 나의 감정과 생각으로 이미 마친 상태였다.

매체성은 미쟝센을, 미쟝센은 나에게 생각과 행동을 유발하는 수행성을. 그리고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미래적인 색채. 이 공연이 가진 현대적인 감각들은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이 공간에 함께 실존하게 만들어준 하나의 마을을 만들어주었다.

차가운 현재의 대한민국의 날씨와 상황들 속에서 바라본 차가운 이야기. 8개의 에피소드가 가져다준 차가움은 되려, 우리의 맘과 머리가 가진 훈훈한 온기를 느끼게끔 만들면서, ‘나’를 발견하게 만드는 거울이 되었다. 그 거울을 극장에 두고, 나는 다시금 현재의 삶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간다. 그 발걸음의 무게가 다소 가볍다.

(사진 제공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