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월 7∼8편 정도의 작품을 보곤 한다. 가능한 많은 수의 작품을 보려고 하지만 공연되는 모든 작품을 다 볼 수 없으니 나름 몇 가지의 기준을 통해 꼭 봐야만 하는 작품들을 선정하곤 한다. 이를 테면 사회문제 그 중에서도 젠더 이슈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거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전통적 드라마의 구조를 띤 작품보다는 포스트드라마 더 나아가 ‘다원’이라 불리는 형태의 작품을 선호하는 편이다. 최근 연극계의 관심 역시 이 두 가지 기준과 유사한 듯하다. 페미니즘 연극을 비롯하여 퀴어 연극까지 남성중심적,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는 작품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다변화하는 매체 환경에 맞춰 연극에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가하는 작품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친절한 ○○씨> 역시 이 두 가지 기준에 부합하여 필자로 하여금 많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 다원분야에 선정되었다는 이 작품은, ‘친절한’이라는 형용사에 ‘○○씨’라는 익명의 대상이 합쳐진 제목 자체만으로 작품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낳게 했다. 젊은 창작자가 바라본 이 사회에서의 ‘친절’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친절하다는 ‘○○씨’는 누구인지, ‘○○씨의 친절함’을 통해 작품이 던지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등 어떤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무대에 펼쳐질지 상상하며 기대감을 안고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기대는 온전히 충족되지 못했다.

친절함을 강요하는 사회, 그 이면의 존재

다섯 명의 퍼포머(performer)가 보면대를 들고 무대로 등장한다. 흰 상의와 검정 하의로 단정하게 옷을 맞춰 입은 이들은 무대 중앙에 일렬로 서서 일제히 같은 멘트를 반복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반갑습니다” ~ 그렇습니까?”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들은 위의 멘트들을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하기 위해 연신 입을 풀고, 목소리 톤을 높이며 자신의 말투를 교정한다. 이들의 말투는 친절해지면 친절해질수록 점점 더 감정이 배제된 채 기계적인 톤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제각기 다른 목소리와 말투였던 다섯 명의 퍼포머들은 어느 순간 같은 목소리와 말투를 구현해내며, 개별적 존재였던 이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칭되어 익명의 누군가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신의 마음을 모두 이해한다”며,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항상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이들의 말은 사실 이들의 진심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들의 진심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그 말들이 진심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퍼포머들이 분하여 표현하는 이들은 이른바 ‘감정 노동자’들이다. 작품에서는 이들을 텔레마케터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한정 지어 표현했지만, 이는 텔레마케터뿐 아니라 서비스업이라 불리는 모든 직종의 수많은 감정 노동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감정 노동은 말투나 표정, 몸짓 등 인간의 감정 표현을 직무의 한 요소로 여기고,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한 채 사회로부터 혹은 고용주로부터 요구 받는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노동을 말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래하면서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로 규정지어지자 ‘친절함’과 같은 감정도 하나의 상품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며 드러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인식과 함께 시장의 ‘갑-을’관계에서 손님은 ‘갑’의 위치에, 손님을 상대하는 기업은 ‘을’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기업의 고용주는 ‘갑’의 위치에, 직원은 ‘을’의 위치에 존재한다. 직원은 ‘을’ 중의 ‘을’이 되어 모든 권력의 최하위에서 자신의 위에 위치한 ‘갑’과 ‘갑의 갑’을 위해 자신의 감정까지 노동의 도구로써 사용한다. 이들이 친절하도록 강요받고, 친절해지도록 움직이게 하는 것은 권력과 자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다른 권력이 한 겹 더 덧입혀진다. 이들이 요구 받는 친절의 형태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젠더 규범에 따라 구분된다. 여성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한 태도를, 남성에게는 정중하고 전문성 있는 태도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여자다움’이나 ‘남자다움’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나 성 역할을 요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회로부터 규정된 ‘여성성’과 ‘남성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강요받는다.

예상하지 못했던/예상했던 무대, 그러나 둘 다 아닌

무대 중앙에 일렬로 서서 말투 교정을 하던 퍼포머들이 잠시 후 각각 2명, 3명씩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자리를 이동한다. 암전이 되자 이들은 요란한 소리로 입을 풀거나, 기침을 하기도 하고, 고객 뒷담화를 하는 등 전화기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텔레마케터들의 일상을 소리내기 시작한다. 다시 무대에 조명이 드리우자 무대 뒷벽에 위치한 스크린에 스코어(score) 화면이 뜬다. 좌우로 나뉜 2명과 3명의 퍼포머들은 각각 한 팀이 되어 마치 게임을 하듯 콜센터 품질 평가(QA)를 실시한다.  여러 항목들에 맞춰 각 퍼포머들은 해당 상황에 맞는 고객응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둘로 나뉜 왼쪽과 오른쪽의 집단이 마치 우열반처럼 이분화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왼쪽의 퍼포머들은 앞의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일반적인 텔레마케터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반해 오른쪽의 퍼포머들은 불친절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며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자아낸다. 실제로 이런 텔레마케터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른쪽의 퍼포머들은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며 상식 밖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과연 작품이 드러내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만약 이를 통해 친절을 강요하는 시스템에 저항하고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면 그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저항의 움직임이 아닌 비상식적인 태도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필자가 발견하지 못한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러한 장면 연출은 위험의 요소를 지닌다. 작품은 앞의 장면을 통해 친절함에 과도하게 매도된 한국사회에서 친절함을 강요받는 ‘타자’로 존재하는 수많은 텔레마케터들을 무대로 소환했다. 무대 위 존재하는 퍼포머들의 ‘몸’과 퍼포머들이 무대 위로 발화했던 수많은 ‘말’들은 이들로 하여금 친절을 요구하고, 이들을 강압적으로 움직이게끔 하는 권력과 자본의 모습을 함께 드러냈다. 그런데 앞의 장면과 대치되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불친절하고 무례한 태도를 일삼는 텔레마케터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무대에 구현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감정 노동을 하고 있을 수많은 ○○씨들의 모습을 지워버리며, 작품이 이제껏 쌓아온 권력과 자본을 배후에 두고 친절함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양쪽 모두 친절함에 기반을 둔 서비스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에 대한 과한 사회적 요구와 그에 따른 지나친 기준으로 인해 모든 텔레마케터들의 평가가 낮은 결과로 나오는 식으로 장면을 연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앞의 논의와 함께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문제의식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을까.

콜센터 품질 평가가 끝나자 퍼포머들은 무대 한 편에 둘러 앉아 텔레마케터로서 느끼는 내면의 이야기들을 꺼내 놓는다. 콜센터에서 일을 하며 고용주로부터 강요받았던 친절에 대한 요구, 고객들로부터 들어야만 했던 폭언들,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을 숨겨야만 했던 순간들까지. 전화기 속 익명의 상담원이 아니라 한 명의 정체성을 지닌 개인으로서 이들이 느끼고 감당해야 했던 감정과 생각들을 무대에 하나씩 던져 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는 작품을 통해 새로 드러난 사실이라기보다 이미 뉴스나 신문을 통해, 그리고 SNS에 떠도는 수많은 커뮤니티의 글들을 통해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작품이 선택한 (여러 명이 둘러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무대화 방식 역시 그 동안 많은 작품들을 통해 이미 수차례 활용된 바 있다. 극장에 들어서며 리플렛을 읽을 때부터, 혹은 퍼포머들이 무대에 등장하여 고객 응대 멘트들을 발화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이러한 서사와 무대는 예상 가능한 전개였고, 작품은 관객의 예상을 그대로 무대에 그려냈다. 40여 분의 공연 시간 동안 작품은 관객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어떠한 지점을 새롭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인가.

발화의 욕구 그 이상의 무엇

요즘 연극계의 풍경을 보면 일련의 정치·사회적 사건들을 겪으며 창작자들의 발화 욕구가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국정 논란, 검열 사태 등의 정치적 사건을 비롯하여 연일 온/오프라인에서 뜨거운 감자로 논의의 중심이 되고 있는 페미니즘, 젠더 이슈까지. 한국사회 곳곳에는 다양한 입장을 가진 목소리들이 넘쳐 나고 있다. 그리고 연극계는 이러한 시대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저마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현상 제시 이상의 깊이 있는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고 현상 그 자체를 무대에 올리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이런 현상들 이면에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는지, 해당 논의에 대하여 창작자로서 자신이 어떤 지점을 문제 삼고자 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등을 밀도 있게 쌓고 채워야 한다. 그리고 이를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무대에 가시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창출해 내지 못한다.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지점을 드러내거나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을 다르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친절한 ○○씨>는 그들이 리플렛에 써 놓은 12줄의 짧은 글이 이 공연의 전부를 담고 있었고, 혹자에게는 그 짧은 글이 공연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제공 – 김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