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멸망한 트로이의 폐허 속에 외로운 넋인 ‘고혼’이 등장하여 노래한다. 무속장단에 스산한 기운은 단숨에 관객들을 트로이의 공간으로 소환한다. 쓰러져 있는 헤큐바는 트로이의 왕비로 바로 전 트로이의 멸망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일어나라 이 할멈아, 견디어라.” 잔인한 운명은 바다를 통해 들어와 물처럼 트로이에 스며들었나보다. 고요한 물결 영상 위로 헤큐바는 어렵게 일어선다. 앞으로 트로이의 여인들에게는 적국의 노예로 팔려갈 암담한, 참혹한, 지옥 같은 삶밖에 남아 있지 않다. 헤큐바와 그녀를 지키던 여인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수려한 언어로 늘어놓지만 무대를 감싸는 건, 오직 소리뿐이다. 그들의 처참한 소리에 가슴이 끓는다.

새삼 이제 와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을 극찬하는 것도 입 아프다. 이미 초연부터 관객들은 예매행렬을 통해 기대를 표했고, 공연을 보고 난 비평가들은 앞 다투어 애정을 보냈다. 지난 9월 싱가포르예술축제 공연을 통해 세계관객들 또한 기립박수로 그 작품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2017년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이 올랐다. 국립창극단의 출연진들은 전과 다름없이 뛰어났고, 무대는 1년의 시간만큼 무르익었다고 한다. 명실상부 이 공연은 훌륭하다. 2012년부터 혁신을 거듭해온 국립창극단의 도전이 이제야 어느 정도 방향을 찾은 것 같다. 판소리, 그 본령으로의 회귀이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나 또한 엄청난 소리의 에너지에 압도당해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넘치는 극찬에 배가 아픈 것일까. 분명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훌륭했고 그 예술적 성과는 칭찬받아 마땅한데, 두 번이나 공연을 관람하면서도 가시지 않는 불편함이 남는다. 그에 나름 애정에서 출발한 군소리를 긴 글을 통해 얹어보고자 한다.

너무나도 나약한 ‘창극’이라는 골격, 창극의 껍질을 까니 판소리가 나왔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싱가포르의 연출가 옹켕센과 짝을 이루면서 미니멀리즘 사조를 연출의 방향으로 잡았다. 판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요 등장인물과 하나의 악기가 짝을 이루고, 음악적 풍성함보다 말과 음을 최대한 돋보이도록 했다. 그 외에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판소리에서의 아이디어가 적극적으로 쓰이고 있다. 소리꾼 배우들의 동선은 무대 중앙에 있는 파빌리온과 중앙의 사각 돌출무대를 주로 쓰는데, 주요 인물들-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나가 각 대목을 노래할 때 서는, 그야말로 소리의 ‘판’ 된다. 하얀 도화지 같은 무대와 배우들의 의상에는 각 대목을 시각화한 이미지가 입혀지는데, 각 인물에 할당된 고수 악기처럼 각 인물들의 소리를 이미지화할 뿐 이야기에 어떤 부연 설명도 되지 않는다.

자랑스러운 처녀성에 상처 입은 카산드라는 그 광기가 드러나는 강렬한 불의 이미지와 함께 애끓는 대금이 고수 악기가 되었다. 남편을 죽인 적의 아내가 되고 아들을 죽음의 손에 양도해야 하는 안드로마케의 어지러운 마음은 절절한 아쟁과 함께 구름의 이미지로 푸른 하늘에 가득한 흰 구름이 먹구름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심란하게 요동한다. 다분히 마초기질이 엿보이는 빨간 손의 메넬리우스는 호쾌한 대취타와 함께 단단한 종유석과 돌계곡의 이미지 가운데로 등장한다. 한편, 헬레나는 어떤 배경영상도 쓰지 않는다. 이번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헬레나 씬은 무성의 존재로 표현된 남성 소리꾼 배우, 차단된 이미지(영상 없음), 피아노 반주(화성) 등의 이질적인 효과를 집약함으로써 킬링포인트의 방점을 찍고 있다. 헬레나 씬은 분명 연출 옹켕센의 예술적 감각으로 이뤄진, 동시대 예술로서의 창극의 변주다. 반면 또 다른 킬링포인트이자 대척점에 있는 헤큐바의 마지막 씬은 그야말로 한국 소리의 본연을 보여준다. 불탄 트로이에 날리는 불씨를 배경으로 손자의 죽음에서 절정을 맞은 헤큐바의 슬픔은 끊어질 듯한 거문고 소리와 함께 마른 소리로 시작하여 신에게 일갈하고 “버티어 서라!”는 마지막 메시지까지 관객들조차 숨도 못 쉴 정도의 소리의 진폭을 보여준다.

연출 옹켕센은 미니멀리즘 정신으로 창극의 껍질을 까고, 까고, 까서 무대 위에 소리만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무대 위 모든 효과들-무대, 영상, 악기, 의상, 소품 모두가 소리 하나만을 위한 부속물로 존재한다고 느껴진다. 무대의 구성이 소리만을 위한 환경으로 조성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말의 맛과 상상력으로 무대를 채울 수 있는 관객에게는 이마저도 과하다. 오히려 공연 전부터 얽히고설킨 인간사를 상징하는 코러스의 소품 빨간 실타래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 단순하면서 다양한 쓰임이 여러 이미지를 연상시켜 판소리의 부채처럼 담백한 맛이 있었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오래된 집의 기본 골격을 되살리기 위해 그 위에 겹겹이 바른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처럼 오랜 시간 창극에 덧입혀진 장식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것은 무엇인가? 판소리다. 창극에서 판소리의 재발견은 곧, 창극의 기본 골격이 너무나도 부실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옹켕센의 미니멀리즘 전략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창극은 넓은 의미의 판소리였다. 많은 관객들이 음악극으로서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속의 소리가 가진 에너지에 압도되었다. 가족의 몰살을 두 눈으로 지켜본 헤큐바의 절절한 비가(悲歌)에서, 미쳐버린 많은 카산드라의 광기어린 웃음에서, 안드로마케의 독기어린 비난에서, 요망한 헬레나의 애간장 녹이는 독창에서 관객들은 소리의 매력에 푹 젖었다. 창극단의 소리꾼 배우들의 역량으로 주요 인물들이 가진 소리적 성향이나 캐릭터별 매력을 뿜어낼 수 있었으나, 창극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서면 이미 1인 판소리의 전통 속에서는 모든 역할을 소리꾼이 홀로 소화하면서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물며 옹켕센의 시그니쳐인 무성존재의 ‘헬레나’는 어떤가. 이미 판소리는 성별을 뛰어 넘어 상상의 자유를 담보하는, 표현의 경계가 없는 양식이다. 이번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다양한 감탄사를 자아낸 남성배우 ‘헬레나’가 등장씬은 판소리였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창극이라는 근대적인 극양식의 프레임 속에서나 남성이 분한 ‘헬레나’가 예술적 표현의 성취라고 과찬 받는 것이다. 1배역 1악기의 구분은 1인 판소리였을 때 오히려 더 주옥같은 음악적 효과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대화식의 분창과 배역 구분이 굳이 창극의 특징이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창극이라는 양식은 토대가 너무 부실한 것이다. 창극의 판소리로의 회귀는 결국 판소리와 창극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남는다.

그나마 이번 공연이 창극이어야 했던 이유를 코러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코러스는 하나의 소리를 합창하는 형태뿐만 아니라, 돌림노래나 화음 등을 통해 소리의 외연을 확장하기도 했고, 군무나 소품 활용의 움직임으로 시각적인 부분도 확장했다. 그들은 트로이의 여인들이면서 평범한 인물이기도 하고, 노예살이의 고통을 겪기도 했으며, 헤큐바를 위해 울어주는 동지이기도 하다. 배역도, 이름도 없지만 코러스의 앙상블이야말로 1인 판소리로는 보여줄 수 없는 창극만이 가진 극적인 역할이었다.

예술지상주의의 국립창극단이 만든 엘리트 창극

극 말미, 고혼은 읊조린다. “우, 우여, 매, 매여, 우매라, 우매여, 우매로구나” 처음과 마찬가지로 스산하게 나타난 고혼은 앞날을 향해 버티어 서겠다는 헤큐바가 무상할 정도로 바람처럼 흩어져 버릴 전쟁 후의 시간들을 예언한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가진 강렬한 소리 예술이 지나가고 난 자리는, 민망하지만 너무도 공허해서 좀처럼 무엇으로 매워야 할지 모르겠다. 이 지점이 지금 창극이 가지고 있는 무상함이 아닐까 싶다. 판소리가 가진 한의 정서며, 한국이 겪어온 전쟁의 기억으로는 분명 『트로이의 여인들』은 창극을 담기에 너무나도 적절한 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분히 기획적인 무대 위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소리의 도구로 전락하여 상징적인 의미는 퇴색되었다.

『트로이의 여인들』이 어떤 작품인가. 호메로스가 전쟁 뒤 남은 자들의 비극을 노래한 이래, 415년 에우리피데스가 주목하여 <트로이의 여인들>이라는 비극으로 정리한 최초의 반전 연극이다. 비인간적인 페라이의 왕 알렉산더마저 이 공연을 보고 잃었던 연민을 되찾았다는 기록을 남겼을 강력한 메시지를 가진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트로이의 여인들’을 앞세워 전쟁을 반대했고, 장 폴 사르트르에 와서 다시 한번 예술적으로 전쟁에 저항하며 국제사회에 각인되었다. 2013년 시리아 암만에서는 시리아 난민 여성들이 직접 자신들의 경험을 <트로이의 여인들>의 입을 빌려 전쟁의 참상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만약,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과 시리아 난민들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동시 공연한다면, 나는 어느 공연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런 질문 앞에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너무나도 기획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 부끄럽다.

『트로이의 여인들』을 국립창극단에 소개한 옹켕센은 분명 명분이 있었다. 먼저 90년대부터 ‘트로이의 여인들’을 소재로 공연을 올렸던 옹켕센은 창극 정서와 한국의 역사 속에서 “전쟁에서의 여성에 관한 독창적인 작품”인 트로이의 여인들과의 접점을 찾았다. “전쟁이란 비극 속에서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로 남고자 고군분투했던 여인들의 고통을 다루는 작품”으로, “한국의 여성이 전쟁 후에 겪었을 고통과 슬픔도 작품에 녹여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에 압도되어 버린 이 비장한 각오는 한 예술가의 개인적 바람일 뿐이다. 민간단체였다면 예술지상주의의 창극으로 외국인 연출을 쓰고, 고대 비극 희랍을 각색하고, 피아노도 쓰고, 유명 디자이너도 부르고 해서 온전히 예술을 위한 창극을 해도 좋다. 하지만 이 작품은 “국립”창극단의 작품이다. 우리의 “국립”창극단은 작품 선택에 있어 무엇을 한 것인가?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분명 “창극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립창극단은 언제까지 창극사에 한 획만 그을 것인가? 국립창극단의 공연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매달 한 편씩, 30회 이상 전석 매진을 이룬다고 해도 연 18만 명의 관객, 5천만 인구대비 0.3%라는 통계치도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존재해야만 하는 국립창극단의 창극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창극인가를 묻고 싶다. 외국인 연출이나 제작진 외에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고, 공유하지 못하는 국립창극단의 작품은 “국립”이 아니다.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사회가 속하지 않은 다른 세상을 그리는 “국립”작품은 결국 예술지상주의의 세계 속에서 “아시아 대표 음악극”, “한국 소리의 징수” 프레임에 갇힌 그들만의 리그이고, 엘리트 창극이다. “국립”의 이름을 가졌다면, 적어도 지금 시대에 대한 고찰을 담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창극으로 용인되지 못했지만 많은 젊은 소리꾼들이 문제의식을 담아 이야기한 동시대 전통공연예술이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다. 국악뮤지컬집단 타루의 <판소리햄릿프로젝트>는 햄릿의 입을 통해 자아분열 된 동시대 청년들의 고뇌를 함께 나눴고, 연희집단 The 광대의 <홀림낚시>는 자본주의의 사회를 탈춤으로 신명나게 비꼬기도 했다. 최근 본 국극 전수자 이결의 <결-그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시대와 배경을 넘어서서 자본주의에 따른 계급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자 한 면도 보였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또한 시대적 변화를 완전 놓고 가지는 않았다. 코러스의 입을 통해 전쟁 속 평범한 사람들의 발화를 시도하고,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버티어서라!”라며 극복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창극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담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압도적인 소리예술의 진공 속에서 배삼식 작가의 노력은 너무 쉽게 휘발됐다.

만약 한국적인 공연을 궁금해 하는 외국인 친구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국립극장에 데려와 창극을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을 하는 외국인 친구가 요청한다면 나는 그의 손을 이끌고 주말 오후 2시의 광화문으로 갈 것이다. 아직도 창극에는 우리의 현실과 삶과 생활과 일상과 동시대가 없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는 온전히 옹켕센으로 시작한, 옹켕센의 역량이었고, 개인적인 성취였다. 국립창극단은 무대 위에 얻은 환호에 도취되면 안 된다. 우리 소리는 세계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았지만,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못했다.

2012년부터 적극적으로 창극의 혁신을 거듭하고 있는 국립창극단이 모처럼만에 보여준 예술적 성과에 찬물을 끼얹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냉수에 정신을 차려야 할 때라고도 해주고 싶다. 잘했다. 훌륭했다. 그저 이제는 “국립”으로서의 이름값을 해야 할 그릇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창극이 더 많은 “국민”과 함께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2016년이랑 세상도 바뀌었잖아? 더 이상 예술가만의 예술이 되지 말기를. 그들만의 리그인 엘리트 창극이야말로, “우, 우여, 매, 매여, 우매라, 우매여, 우매로구나”, 무상하다.

(사진 제공 – 국립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