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주인공(주견공)은 사람이 아닌 개다. 개의 이름은 길다. 무려 열 글자,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 개가 사라진다. 주인은 캐롤이다. 사라진 개를 향해 캐롤이 “질주”하고, 그 캐롤에게 다른 사람들이 “질주한다”. 이것이 극의 주요 사건이다. 개를 잃은 이야기에 인물들이 교차하며 말의 홍수가 이어진다. 개의 이야기, 개에 대한 이야기, 개 같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개소리’를 ‘진지’하게 쏟아내는 것은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 매력을 포착하는 순간, 연극의 “싸움은 시작된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구자혜 작/연출)은 제목 그 자체로 공연의 형식과 내용을 지시한다. 연극은 사라짐, 그리고 그 사라짐을 겪는 누군가의 고통에 관하여 치열하게 말하고 소리친다. 사라짐과 고통에 대한 “질주”는 연극 바깥을 향하기도 하지만, 연극 자체에도 해당한다.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은 연극 안팎을 넘나들며 잃어버린 것과 사라진 것을 부르짖는다.

델마: 사라진 타자와 해방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긴 이름은 무엇을 상징할까? 사라진 무언가를 지시하는 이 이름을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 세 부분으로 나눠 차례로 이야기해보자. 우선 ‘델마’에 관하여. 리들리 스콧 감독의 유명한 영화 〈델마와 루이스〉(Thelma and Louis)의 델마(Thelma)가 떠오른다. 영화 속 델마 역시 질주한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집을 떠나 루이스와 함께 일탈한 델마는 순종적으로 살던 삶을 벗어난다. 요컨대 남성 중심의 억압적 사회에서 벗어나 탈주하는 주체적인 여성이 바로 델마다.

오늘날 세계는 델마의 일탈과 같은 ‘억압받는 타자의 해방’을 등한시한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은 그간 이러한 현실을 냉소하고 비웃는 것에 주력해 전작들(〈commercial, definitely〉,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 작성 가이드〉, 〈킬링 타임〉)에서 가해자를 발화 주체로 세웠다. 가해자들의 변명과 수사가 흘러넘치는 무대를 보여줌으로써 억압된 타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을 드러냈다.

전작과 달리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에서는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 엄밀히 말하면 ‘사라짐 그 자체’의 비명이 중심에 선다. 사라진 개,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꾸준히 무대에 등장한다. 무대 중심에서 직접 말하고 소리치는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의 존재는 사라진 타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연극은 사라짐뿐만 아니라 상실의 겪는 사람의 아픔에도 조명을 비춘다. 캐롤은 소중한 개를 잃어 슬퍼한다. 그러나 주변에선 그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말해 버린다. 사람들은 상실의 슬픔에 공감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와 제도에 인정받아야 한다며 캐롤에게 입증과 설명을 요구한다. 그로 인해 사라짐에 대한 슬픔과 기억은 희미해진다. 캐롤의 질주는 이에 맞선 발악이자 저항이었다.

슬퍼하며 질주하는 캐롤과 주변 인물들의 대사는 말인지 비명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칠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캐롤에게 ‘사라짐’을 ‘죽음’으로 바꾸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잊으라는 것이다. 사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저 아래 땅 밑 어딘가에 있는데 말이다. 아니,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쏟아지는 말 사이를 가로질러 무대 한가운데서 울부짖는다. 그러나 곧 바깥으로 밀려나고 만다. 사라진 타자는, 그렇게 돌아오지 못한 채 또 다시 추방당한다. 사람들은 소리친다. “What a fucking missing dog!” 그저 개를 잃었을 뿐인데, 그깟 개 하나 때문에, 고작 개 하나 잃었다고… 누군가에겐 그 개 하나가 무엇보다 소중할 텐데.

혹은: 잃어버린 둘 사이의 가능성

학교가 상징하는 제도와 사회 시스템은 사건을 이분법으로 손쉽게 처리한다. 캐롤은 결석을 인정받기 위해 학교에 전화를 걸었고, 무수히 많은 1번과 2번 사이에 놓이게 된다. 1번과 2번 사이를 오가며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도 두 개의 선택지만 남는다. 학교가 결석 사유로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질병’과 ‘누군가의 죽음’ 단 두 가지뿐이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에서 ‘혹은’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둘로 나뉜 체계에 대한 반발이지 않았을까?

개와 연극 주인공은 이름이 짧아야 부르기 좋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은 기어코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열 글자를 고집한다. ‘델마’라고 불러도 안 오고, ‘그로토프스키’라고 축약해도 개는 반응을 안 한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온전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다가와 개가 되었다.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은 ‘혹은’이 담고 있는 여지, 1번과 2번 사이 어딘가에 있을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사회의 타자들은 대개 1번과 2번 바깥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혹은’은 오늘날 연극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명확한 메시지, 인물과 하나 되는 연기, 하나의 주제 등을 추구하는 연극에서 ‘혹은’은 금기였다. 우리가 보는 것은 연극일 수도, 혹은 실제일 수도, 혹은 둘 다일 수도, 혹은 둘 다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연극은 ‘혹은’이 지녔던 가능성을 제거했고, 일방적인 계몽하는 연극으로 변질되었다.

반면,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은 철저히 그 반대의 모습을 취한다. 공연 보는 내내 연극의 서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인물의 목표는 어디로 향하는지, 주된 갈등은 무엇이며 궁극적인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읽어내기가 도무지 어려운 연극이다. 서사를 파악하려 하고, 인물의 일관된 개연성을 찾다가도 번번이 실패한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뜬금없는 메타 연극적 요소들이 불쑥 끼어들어 ‘혹은’의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대화 중 다음 ‘장(chapter)’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 이렇게 유치한 대사를 왜 해야 하느냐는 조소, 연극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 따위를 거침없이 대사 중간에 끼워 넣는다. ‘빈 무대’, ‘말을 한다’, ‘엔터’ 등의 지문도 대사로 발화한다. 고전 희곡을 패러디한 제목들을 읊기도 한다. 틈틈이 오랜 연극 문법과 관습을 조롱한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진지해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낸다. 연극의 거짓을 고발하고 본질에 다가가려는 의도였다. 다시 말해 ‘그로토프스키’를 되찾기 위한 망가짐이자 자조적인 폭로였다.

그로토프스키: 연극과 연극 바깥에서 찾아야 할 것

공연에선 ‘그로토프스키’를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스키’로 끝나는 이름을 차용해 개의 이름에 붙였다. 그러나 이 이름은 연극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예르지 그로토프스키(Jergy Grotowski)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20세기 연극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연극 연출가이자 이론가, 실험가다. 연극 미학에서 그로토프스키는 ‘가난한 연극(Poor Theatre)’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기술과 기교를 없앰으로써 본성과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제거의 미학’이다.

그로토프스키 훈련(트레이닝)은 배우의 체력을 극한까지 몰아간다. 육체가 소진되면서 본질과 충동이 드러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물이 “질주한다”는 구자혜의 표현은 이러한 그로토프스키 훈련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공연 중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거칠고 숨 가쁜 상태를 대놓고 드러낸다. 일부러 호흡을 헥헥거리며, 발성 또한 상당히 과장되었다. 오늘날 우리 연극이 본질을 지우고 기교만 남겨 놓았다는 것을 비꼬는 듯하다.

극 중 홉킨스 선생은 기교의 연극 즉, 거짓된 세계를 상징한다. 홉킨스 선생에 따르면, 캐롤은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의 죽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주변 사람들은 홉킨스 선생의 말대로 결석을 인정받아야 취업 따위에 별문제가 안 생길 거라고 설득한다. 오늘날 연극(인)이 각종 지원금에 목을 매며 제도권의 ‘인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상된다. 인정받기 위해 연극의 사망을 선고하는 오늘날 연극계의 풍경이 겹쳐 보인다.

우리 연극은 본질, 그로토프스키를 잃었다.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이 연극과 연극 바깥을 거칠게 넘나들며 냉소와 자조, 절규와 비명을 뿌려댄 건 결국 거짓에 대한 성찰이었다. 색조명도 없고, 무대 세트도 없는 빈 무대, 그 위에 오롯이 배우들의 몸과 말만 세웠다. 그들은 단일한 서사와 계몽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려 질주한다.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은 공연 그 자체가 거짓을 제거하고 연극의 본질을 복원하려는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이었다.

나아가 연극은 우리 사회에도 그로토프스키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사라짐을 함께 기억하고 슬퍼하면 안 되겠냐고, 상실을 겪어 아파하는 사람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는 없는 거냐고 호소한다. 이 간단하면서도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갖 기교와 설명으로 치장한 “구구절절”의 가식이 아닌, 소박하고 진실한 기억을 붙드는 가난한 애도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캐롤은 외친다. 죽은 게 아니라고,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기다릴 거라고. 연극의 마지막에 이르면 질주하던 인물들이 차례로 쓰러진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제외하고 말이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아직도 하수구 어딘가에서 슬피 짖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제공 – 여기는 당연히, 극장(김도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