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4년 만에 열린 즉흥음악 페스티벌 닻올림픽Dotolympic 2017에 다녀가며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를 나오는 길에 벽면에 붙은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공연의 제목으로 보이는 〈프로메테우스〉는 음운(음소) 단위로 파훼되어있고 각각의 자․모음 위에 상응하는 점자가 달려있다. 포스터 우측에 ‘PROMETHEUS’가 캘리그라피로 세로쓰기 되어있다. 그리고 바로 왼쪽에는 ‘Audio Play with music by Hong Chulki in pitch darkness’ ―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홍철기의 음악과 함께 하는 오디오극'(필자 주). 현대음악 내지는 실험음악을 곧잘 찾아듣는 편이라면 한국 최초의 노이즈 음악 그룹으로 알려진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를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홍철기는 1997년 최준용과 아스트로노이즈를 결성해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즉흥음악가이다. 홍철기가 음악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내게 이 공연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베뉴는 마찬가지로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다. 〈문래공진 Mullae Resonance〉이라는 이름으로 7년째 사운드아트창작워크샵을 진행해오고 있는 문래예술공장은 소리를 품은 채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작업들의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박스씨어터라는 공간이 지닌 특성은 그 안을 채워 온 콘텐츠만큼이나 다원적이다. 구조와 용도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직육면체 형태에 면적은 넓지 않으나 가로로 긴 편이고 천장이 높아 기계실이 3층 높이에 닿아있으며, 필요에 따라 연습실이나 공연장으로 쓰인다. 다시 말해 무대와 객석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갤러리까지 객석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1층 마루에 기획자 혹은 연출자가 지정하는 곳이 객석이 되고 퍼포먼스 공간이 된다. 객석을 다 빼고 나면 한쪽 끝에 위치한 콘솔을 제외하고는 텅 빈 블랙박스로서, 가령 워크샵과 워크샵에 대한 발표―공연―가 한 자리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공연 당일, 매표소에서 관객들은 사전 텍스트가 빼곡히 적힌 A4용지를 건네받는다. 하이너 뮐러가 쓴 ‘프로메테우스의 해방’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하단에는 “1973년 초연된 뮐러의” “희곡에 삽입된” 텍스트라는 것과 “1986년 작곡가 하이너 괴벨스가 이 부분만 가지고 하이너 뮐러와 함께 Audio Play를 제작한 바 있다”고 덧붙여져 있다. 나는 이 공연의 존재를 알고 나서 SNS 검색을 거쳐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 후원자이자 관객이 되었으므로, 이미 공연의 바탕이 되는 하이너 뮐러의 〈프로메테우스〉 텍스트를 비롯한 공연의 시놉시스와 기획 배경을 숙지한 상태였다. 하이너 뮐러의 〈프로메테우스〉는 아이스킬로스가 썼다고 알려진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포박당한 프로메테우스」, 「해방된 프로메테우스」 총 3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포박당한 프로메테우스」를 원문 텍스트의 특성과 질감을 최대한 살려 독어로 번역한 희곡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연의 텍스트 번역과 드라마투르기를 맡은 (그리고 사실상 기획 주체인 독립출판 & 다원 네트워크 이오-에디션의 대표이기도 한) 라삐율이 한국어로 번역해 몇 년 전 출간했다.

박스씨어터로 들어서자 중앙에는 52개의 의자들이 불규칙적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고 4개의 스피커는 전면부가 객석이 있는 중심을 향한 채로 각각의 위치가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단 52명의 관객들만 수용하여 각자 앉은 곳에서 자리만 옮기지 않으면 몸의 방향을 트는 것은 자유다. 4채널의 입체사운드 환경을 기본으로 공연 중에는 음악가 홍철기가 스피커를 들고 객석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상연(혹은 낭독)은 일절의 라이브 음성 없이 오로지 스피커에서만 출력되는 음원으로만 이루어지며, 내가 의자를 틀어 어떤 자세를 취하냐에 따라 다른 음향 체험을 하게 된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는 공연장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이동도 불가능하다. 나는 3일의 공연 중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 그리고 둘 째 날의 관객과의 대화에 참관했다. 차츰 익숙해지자 조명기 램프 유리구의 형광물질이나 틈 사이로 미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있어 물체의 윤곽이 보일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광원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어둠이었다고 하긴 힘들었다.

첫 날에는 중간에 놓인 의자에 앉았는데, 평상시 시력에 큰 불편함이 없는 나로서는 익숙지 않은 깜깜한 시야에 압도되어 패닉 상태에 빠지기 전에 눈을 꼭 감고 오디오에만 집중했다. 두 번째 공연에서는 바깥쪽 의자에 앉아 첫 날과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앉고 공연 중에는 눈을 뜬 채 어둠을 응시하려고 했다. 집중해서 바라볼 대상―초점―이 없으니 집중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후술할) 여러 가지 이유로 귀에 들리는 내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상당히 힘이 들었다. 앰비언트 음악 따위의, 사운드가 균질하지 않고 질감이 거친 전자음악/전위음악을 즐겨 듣는 데도, 난청인 동시에 난해했다. (하이너 뮐러의 텍스트가 원문부터가 온전한 문장의 구조와 어순을 지키지 않은 채 난독을 외려 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끊임없이, 내가 행하고 있는 관람, 아니 청취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유는 갈수록 깊어졌다. 공연이 끝나고도 어쩐지 개운치가 않았다.

첫째, 연극인가 아닌가?

(연출의도로 읽히는) 공연 리플렛의 글에서 필자―높은 확률로 ‘라삐율’―는 2014년도에 하이너 뮐러의 〈프로메테우스〉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당시를 상기하며, “독자로서 책을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연극을 ‘발생’시켜 보겠다는 관념적 실천”을 언급한다. 연극의 (시각적) 요소들을 배제하고 다만 낭독만으로 연극을 가능케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분명 연극이다. 아니,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혹은―목적의 달성 여부를 떠나―연극으로 ‘의도되었다’. 그러나 오롯이 연극이 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있다. 단순히 낭독공연이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수많은 ‘낭독공연’들이 ‘연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고.) 마치 거부반응을 일으키듯 어떤 ‘모순’과 ‘충돌’들이 산재해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경계에 놓여있는 작품은 존재 자체만으로 즐거움을 주기에 어느 한쪽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지만, 한편으로 떠오르는 의문(을 가장한 규정에의 욕구)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이 연극이라는 서술에 반박할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에 언급한 텍스트 안에 답이 있다. 이어지는 리플렛의 글에 따르면 이러한 발생은 “연극적 상연, 관객과 배우의 관계, 연출의 존재 등을 제거”함으로써 성립된다. ‘연극적’인 것과 ‘연극’은 분명 다르다. 관객과 배우의 관계를 허무는 시도들도 많고 연출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는 (혹은 지우는) 연극들도 있다. 그러나 지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그나마 우리가 통상 연극이라고 인지하는 지표들마저 찾아볼 수 없고, 결정적으로 “연극적 상연”―나는 이 표현을 일회성과 현장성이 전제된 ‘라이브’로 받아들였다―이 없는 ‘연극’을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둘째는 파편화된 텍스트들이다. 이 공연에서 텍스트(들)은 의미로서 오롯이 전달되기를 거부하고 다만 소리 혹은 소음으로서 존재할 때가 부지기수다. 단순히 언어―의사소통의 기제―로서의 기능을 잃은 일차원적인 음성 이상으로, 문장의 구조도 작품의 서사도 모조리 해체시켜놓는다. 이를 대체할 시각적 요소들도 없다. 공연은 배우 혹은 퍼포머의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는 어쿠스틱의 소리가 아닌 철저하게 스피커의 진동판을 거쳐 나오는 직접음 혹은 그 잔향(간접음)으로만 채워진다. 이는 “연극적 상연”이 “제거”된 위의 서술과도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같은 맥락에서, 상호독립적은 개별 음성들은 믹싱이라는 전자적 방식으로 합성 및 동시 송출됨으로써 최종적인 결과물로서 같은 청취 공간에 존재하게 되나 사실 행위자(낭독자)들은 행위(낭독)가 벌어지는 순간에 단 한 번도 서로 같은 공간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낭독이 라이브가 아닌 사전 녹음과 음원 재생으로 대체되면서 현장에는 음성만 남고 낭독자의 존재는 사라진다. 즉 현재 연극이 발생하는 공간에 행위의 주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에 혹은 스피커 저편의 아공간에 존재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철저히 포스트 드라마적이나 수행성은 결여되어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워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체험)이라니.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에게도 실제로 공연 중 연극이 발생하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암흑에서 빠져나온 지금은 실은 모두 감상이고 허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둘째, 원전(原典)은 무용(無用)한가?

4개의 채널을 통해 울려 퍼지는 사운드들은 서로 중첩되고 뒤엉킨다. 가청성이 떨어지는 청취 환경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는 의도된 것임에 분명하고 실제로 “낭독”은 “최소한의 전달”만을 목적으로 하며 관객의 몫은 “다양한 소리질감과 구조를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텀블벅 페이지에)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전은 단순히 낭독을 위한 재료로만 소비된 것인가?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는 관객들에 그 존재조차 인지되지 못한 채 소리 저편에 영영 묶여있어야만 하는가? 나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와 이오)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게다가 두 번째 공연에서는 라삐율이 번역한 하이너 뮐러의 〈프로메테우스〉의 텍스트를 훑고 난 뒤였다. 한 번의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좀 더 안정된 상태로 소리의 분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 낭독의 음성은 나에게 온전히 ‘소리’로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가.

호흡이 들어간 발성으로 한스럽게 쭉 뻗어내는 헤파이스토스의 외침과 그에 비해 꽉 찬 발성과 확신에 찬 어조의 크라토스와 비아―실제로 이들은 전문 배우에 의해 낭독되었다―, 조금 느리고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다’ 10대 초반의 여성의 목소리로 덧입혀지는 프로메테우스―점자를 매개로 낭독한 시각장애인 교사와 한 초등학생에 의해 낭독되었다―, 호되게 꾸짖는 듯한 짙은 탁성의 오케아노스―판소리 명창에 의해 낭독되었다―, 매번 음성의 주인공이 바뀌었던 이오―다수의 여성들에 의해 낭독되었다―, 한국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발생되어 중첩되었던 헤르메스―한국인 문인과 독일인 기자에 의해 낭독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공격적이게까지 들렸던 코러스―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에 의해 낭독되었다―까지. 음성을 채취한 장소와 환경까지 모두 달라 매 순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불균질함에도, 분명한 하나의 기호로 다가왔던 무수한 소리들이 의미의 대상이 아닌 감각의 대상으로만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셋째, “강제”와 “제한”은 감각의 확장을 야기했는가?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 공연이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여느 실험 공연보다도 더 많은 제약을 강행한 이유는 그러한 환경에서 관객들이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감각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이 소리의 향연을, 그로 채워지는 공간을,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일련의 부산물들을 충분히 감각하고 있는지 공연 내내 끈질기게 되뇌었다. 내가 예정에 없던 재청취를 하게 된 것도 첫 공연에서는 이에 대한 확답을 스스로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각 기관이나 대상이 제한적이면 남은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특정 기관이 기능적으로 비대해진다고들 하지만, 막상 해보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오히려 신경을 빼앗겨 생각만큼 한 곳에 집중하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글에서 ‘체험’이라는 단어를 구태여 쓰지 않으려 하는 것 역시 이것이 청취를 넘어 체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결론에서다. 우리의 신체는 보통 단일한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는 것보다 여러 기관이 동시에 감각하는 이른바 공감각에 의해 더 크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해야 하는 본 공연은 일차원적인 감상을 넘어 또 다른 체험의 층위로 진입하기에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지 않았나 한다. 청각이 특별히 예민하지 않고 평소 몰입형 체험이 익숙하다면, 주변 환경에 집중할수록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는 것 같은 소외감(소격감)은 그것이 생경한 관객일수록 더더욱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라 예상한다.

시각장애인인 점자 교사와의 협업 때문인지 객석에는 시각장애인 관객들도 많았다. 사실 배리어프리 공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다만 시각 기관에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 관객에 비해 시야(빛)의 차단에 익숙하고 청각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시각장애인 관객들이 공연에 대해 어떤 피드백을 주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럼에도 청취 환경이 일상과는 유리되어있는 특수한 상황이라 어떤 감각과 경험들이 발생했을지. 음향적으로는 청취 공간의 공간특정성이 두드러지지 않아 나로서는 체험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말에서 ‘관객’은 한자어로 ‘볼 관(觀)’자를 쓴다. 반면 영어에서 관객을 뜻하는 단어로 가장 널리 쓰이는 ‘audience’는 ‘aud(i)-‘ 즉 ‘소리’와 ‘청각’에 어근을 두고 있다. 오디오극 암흑공연 〈프로메테우스〉에서 우리는 관객―보는 자―와는 멀어졌지만 audience―듣는 자―에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다만 빛이 차단되었다고 해서 청각 기관을 제외한 신체의 모든 감각이 스위치 내리듯 꺼지는 것은 아니라 세포 단위에서 여전히 호흡하고 있기에, 우리는 ‘듣는 자’는 되어도 ‘듣기만 하는 자’는 될 수 없다. 특정 감각을 인위적으로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새로운 체험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인지, 세 가지 의문은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