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한국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연일 뜨겁다. 대중매체는 물론, 연극계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나 좌담들이 늘어나고 있다. 배우 개인의 내밀한 경험에서 출발하여 사회구조적 문제로 작품 속에 확장된 시각을 담고 있는 극단 ‘사막별의 오로라’ 역시 ‘여성/몸’이라는 키워드를 집중탐구하며 페미니즘 연극의 맥을 이어가는 극단 중 하나이다.

특히나 ‘사막별의 오로라’는 독특한 극단 구성이 눈에 띤다. 이들은 연출가나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극단 구성방식을 거부하고, 여성 배우 두 명을 중심이 되어 대본을 만들고 직접 연출하며,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 그리고 드라마터그가 이 전반적인 제작 과정에 함께한다. 드라마터그는 극단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긴밀한 관계 속에서 대본을 공동구성하고 연출과 연기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그러니 공연 팀은 두 배우와 드라마터그, 세 사람을 구심점으로 구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소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작업 방식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 이들은 왜 이런 구성방식을 택했으며, 어떻게 작업을 이어갈까? 그리고 이 안에서 드라마터그의 역할은 어떻게 유동적으로 변화할까? 11월, ‘사막별의 오로라’의 〈MAKE UP TO WAKE UP 2〉 공연을 마친 드라마터그 권세미를 만나 그들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Profile

이름 : 권세미

직업 및 소속 :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마을미디어지원센터 근무. 소속 없음

첫 드라마터지 작품 :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상희 연출, 2009)

가장 애정하는 작품 : ‘사막별의 오로라’의 〈MAKE UP TO WAKE UP 1, 2〉

가장 좋아하는 연극 : 요즘 왕성하게 활동하는 젊은 여성 연출가들의 작품들

〈유리가면〉에서 시작된 연극의 길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권세미는 연극배우를 소재로 한 일본의 인기 만화 〈유리가면〉의 영향이라는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후 농담이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어린 시절 감명 깊게 본 작품 속 주인공이 연극 무대에 서는 장면은 그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세미는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으나 스스로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여 미학을 선택했다고 한다. 막연하게 미학을 공부하면 예술과 관련된 공부를 할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입학한 학과의 공부는 철학에 가까웠고, 자연히 예술과 관련된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몸담은 동아리는 노래패였다고 한다.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연극 동아리를 보게 되었고, 연극이라는 형식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 같아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존에 있던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였지만, 후에 여성주의 친구들과 새로운 연극동아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함께 연극을 만들었던 친구들 중 몇몇은 여전히 연극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2007년, 권세미는 연극을 보다 공부하고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전문사 과정에 입학하였다. 연출 전공자였기에, 자신의 작품을 연출하는 데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이때만 해도 드라마터그 역할에 대해서는 들어보거나 드라마터그인 친구를 통해 활동 모습을 지켜보는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권세미는 전문사 이후 주로 드라마터그로 프로덕션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현실적, 심리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한다. 연극창작과정에 계속해서 참여하고 싶으나 회사에 다니기 때문에 연출을 할 만큼 물리적인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심리적으로도 막중한 부담감이 짓누르는 연출을 하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권세미는 극을 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드라마터그를 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막별의 오로라‘ 두 배우와의 만남

권세미와 ‘사막별의 오로라’의 두 배우, 김정과 황은후는 대학원 시절 연출가와 배우로 연을 맺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이들은 배우이자 연출가와 드라마터그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권세미가 연출가의 포지션이 아닌 드라마터그를 맡게 된 것은 스스로 연출을 하고자 하는 배우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객관적으로 점검해주고, 무엇보다 ‘여성/몸’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함께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눠줄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두 배우는 권세미에게 드라마터그의 역할을 제안했다고 한다.

‘사막별의 오로라’의 작업과정은 리서치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특히 〈MAKE UP TO WAKE UP〉의 경우, 여성/몸과 관련된 이론 서적을 읽고, 사례들을 종합하면서 자신들만의 키워드를 찾아갓다. 그런 후 키워드로 창작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이때는 움직임을 통해 장면을 만들거나 뷰포인트 컴포지션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각들을 연습실에서 팀원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일종의 공연의 형식을 갖춰가는 퍼즐 맞추기가 이뤄졌다. 드라마터그는 이 과정에 전반적으로 참여했다. 함께 자료를 찾고, 배우들이 창작한 장면들을 펼쳐보고 구성방식을 함께 고민했으며, 최종적으로 이를 대본화 하는 작업도 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MAKE UP TO WAKE UP〉 1, 2 모두 드라마터그가 공동창작자로 이름이 올라갔다.

‘사막별의 오로라’의 두 배우들은 대본 구성을 할 뿐만 아니라 연기와 영상, 무대, 조명 등 전반적인 공연의 제 요소에 대한 컨셉을 구상하고 조율하여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배우가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하는 것이 낯설다는 필자의 질문에 권세미는 이를 ‘더 좋은 배우가 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배우도 어떠한 의미에서는 모든 연극에서 이미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더 많은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배우가 공연을 연출하면서 그 안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안에서 전체를 보는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이들이 스스로에게 ‘연출’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이유는 스스로 그리는 그림으로 공연을 만들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자 책임이라고 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 속에서 드라마터그는 권한의 한계 없이 이들 작업 전반이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고 한다.

누구든 연출의 역할을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연출은 하나의 역할인 거고, 그걸 일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연극작업의 방식이라면, 팀에는 다양한 연출 역할들의 합집합인 거죠.

권세미의 이러한 말은 이들이 고정적인 연극적 관습에서 자유롭게 창작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이들에게는 특정 역할을 하는 누군가를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연출가로 프로덕션에 참여할 때와 드라마터그로 참여할 때 다른 점은 존재한다고 한다. 연출가는 아이디어를 선택하지만 드라마터그는 제안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출가일 때는 자신의 시선을 조금 더 절대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터그일 때는 제안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른 방향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보다 다양한 사고를 자극하는 동력이 되기도 할 것이다.

페미니즘 연극을 위한 새로운 연극 만들기 방식

앞서 살펴본 바처럼, ‘사막별의 오로라’의 두 배우와 드라마터그 권세미는 여성과 여성의 몸에 대한 연극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남성적 연극제작 방식으로부터 탈피한다. 연출을 우두머리로 한 군대식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기존의 수직적 제작 구조로는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주제 의식을 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세미에 따르면 기존의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고 보다 창조성을 살릴 수 있는 대안적 방식을 모색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스타일 혹은 연극체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친밀하고 눈치 볼 것 없으며, 꼭 맞지 않더라도 더 가볼 수 있는 그런 유연함이 이러한 제작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과 ‘몸’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있었고 이들이 느끼는 문제의식, 혹은 새로운 제안들을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권세미의 경우 대학시절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왔으며, 두 배우의 경우 배우 생활을 해갈수록 어떠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서 자연히 페미니즘에 관심 갖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두 배우는 여배우에게 쏟아지는 시선들, 연기에 대한 부분뿐만이 아니라 외모나 여성적 태도에 대한 기대 혹은 강요들을 마주하면서 벽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몸의 감각으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중요하다 생각하던 이들에게 몸을 틀 안에 우겨넣는 듯 갑갑함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에게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들을 몸이 어떻게 감각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몸의 상태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함께 공부를 하면서 주제의식을 확장해 나갔다고 한다.

이는 〈MAKE UP TO WAKE UP〉 1과 2 사이의 변화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MAKE UP TO WAKE UP 1〉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여 장면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배우로서 느꼈던, 혹은 여성으로서 느꼈던 압박에 대한 개인적 경험들이 각 장면의 중심 소재가 되었다. 1편이 보다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관점에서 여성과 몸에 대해 탐색했다면, 2에서는 시각을 좀 더 확장해 여성에게 아름다움의 틀을 씌우는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누가, 왜 만들어내며, 이는 여성의 몸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를 무대 위에서 풀어내는 방식은 상징적 개인의 미시적 경험이지만, 문제의식이 보다 구조적 문제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터그 권세미의 연극관

권세미는 연극을 만드는 데에는 다양한 목적이 있겠지만, 사회의 어떠한 부분을 무대 위에 재현한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갖는 일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무엇을 무대 위에 올리고 말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는 사회에서 지워져버린 존재들, 이야기들을 연극 무대 위에서 만나고자 한다.

고정관념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고정관념의 범위를 확대한다는 경계를 넓히는 행위 혹은 정상성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있어요.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기존 가치체계를 반복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회의 구조 속에서 흐릿해져가는 존재들을 다시 무대 위로 올리는 일, 끊임없이 규범과 이데올로기를 뒤흔들고 타자들과 공생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일이 연극의 중요한 임무라는 권세미의 말은 연극이 갖는 정치성과 맞닿는다. 연극은 끊임없이 지형을 흔들고 새로운 시각을 끌어 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권세미는 연극의 작업자들 역시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흔들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드라마터그를 꿈꾸는 이들 역시 드라마터그의 역할을 고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가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행위에서 역할이 시작된 것이지, 역할에서 행위가 시작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할을 규정하고 그에 맞추려고 하기 보다는 다양한 드라마터그의 역할을 상상해보고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나간다면 보다 즐겁고 의미 있게 연극 작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 제공_ 예준미, 사막별의 오로라 페이스북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