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0일부터 사흘 동안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에서 복합전시 〈moving line of hateful:혐오동선 ㅎ-ㅎ-ㅎ-ㅎ〉(이하 〈혐오동선〉)이 있었다. 〈혐오동선〉은 공동창작집단 요지컴퍼니의 두 번째 프로젝트로, 이들은 지난 작업에서도 핵심이 되었던 ‘혐오’를 이번 작업에서도 열쇳말로 이어 간다. “혐오가 관계의 기본이 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던” 연극 〈살기로운 생활〉(2017. 8. 24 ~ 9. 3. 알과핵 소극장)에 이어(필자는 이 공연을 보지 못했음을 미리 밝힌다) 이번 작업에서는 “혐오라는 감정․현상을 각각의 선으로 움직이고 자취를 남긴다”를 기조로 하여 창작자 네 명 각자의 사진․설치(박세인), 오브제(최민경), 영상(김다빈), 퍼포먼스(김연재 구성․연출, 권주영․박세인 출연)를 복합전시로서 선보였다. 하나의 감정이자 오늘날의 현상이 된 ‘혐오’는 〈혐오동선〉에서 창작자 각자의 사유가 담긴 작품들로 제시되었고, 1967년부터 45년간 목욕탕으로 운영되었던 행화탕의 공간 특징을 활용해 창작자들은 전시의 관객들 각자가 그 자신의 혐오와 혐오의 경험을 세밀하게 관찰하기를 바랐으나 그것의 온전한 성공은 아직 남은 과제로 보였다.

혐오를 둘러싼 네 개의 파편적 사유

행화탕으로 들어서면 카페가 먼저 보이고, 〈혐오동선〉의 관객은 그 안의 또 다른 입구로 들어가 전시공간을 만난다. 이 복합전시에서, 사흘간의 전시 기간 동안 클로징 직전에 1회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제외하고 관객은 세 개의 작품을 먼저 볼 수 있다. 이때 작품을 보는 순서는 관계없다. 어떤 전시장이든 그것은 관객의 자유일 것이고, 일반적으로 전시에서 작품의 배치는 관객의 동선을 고려한 작가․기획자의 치밀한 계산에 달렸지만 여기에서는 유독 무관해 보인다. 〈혐오동선〉에서 네 개 작품은 모두 혐오에 관한 저마다의 생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작품을 연결하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본 것은 박세인의 사진과 설치 작업인 〈나는 니가 싫어, 근데 나는 더 싫어〉이다. 혐오라는 주제에 천착한 박세인은 그의 혐오가 자기혐오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뿌리를 찾고자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그는 그가 살아온 집과 학교의 이모저모를 찍은 사진을 전시하며 “혐오의 상황에서 괜찮은 척하며 외면과 탈출만을 반복”해왔다고 고백한다. 혐오는 그렇게 ‘괜찮은 척’하는 태도를 만나(사실은 자기를 혐오하거나 누군가를․무엇을 혐오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더욱 공고해지고, 그렇게 숨겨져 깊어지는 혐오는 더 숙련된 괜찮은 척을 낳으며 깊이 뿌리내려 갈 것이다. ‘기도실’이라 이름 붙여진 좁은 공간, 벽에 붙은 ‘불행해지는 방법 14단계’가 적힌 큰 종이를 보며, 관객은 자신에게 뿌리내린 혐오를 조용히 돌아본다.

네모진 작은 구멍을 통과해 행화탕의 뒷공간으로 올라서서 본 두 번째 작품, 김다빈의 〈SKIN〉은 오늘날의 ‘현상’으로서의 혐오에 방점을 둔다. 그는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라는 두꺼운 피부’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질문하며 두꺼운 피부를 가진 분홍색의 두상이 쇠공에 깨지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상은 혐오가 대중적 언어로 자리매김하는 현상을 바라보며 “시간이 흐를수록 경화되고 고착되어지는 혐오에 대한 두려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스스로와 우리에게 건네는 각성의 제안이다.

세 번째로, 전시의 주 공간으로 돌아와 중앙에 위치한 최민경의 오브제 전시 〈GOOD NIGHT, ALL〉에 이르렀다. 아이가 누울 법한 사이즈의 텐트가 있고, 텐트의 뚫려있는 천장 위에 매달려 있는 모빌에는 갖가지 물체들이 매달려 있다. 최민경은 “혐오하지 않도록 애써왔던 [자신의] 시간, 기억, 감정”을 관찰하여, 그것을 모빌의 양쪽에 물체를 매달며 균형을 이루도록 만드는 과정에 은유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기어코 기울게 되고, 또다시 자기를 매달아가며 균형적인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것은 정말 균형일까? 최민경은 “시각적인 균형을 이루는 데서 오는 심리적인 불균형의 자취”를 질문하며, 우리가 놓인 “정지할 수 없는 균형”의 조건과 그리하여 균형과 불균형을 끊임없이 오가는 우리의 존재 양태를 모빌이라는 오브제로 구현한다.

김연재가 쓰고 연출한 퍼포먼스 〈비닐남녀〉에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아기인 그들은 각자 비닐 속으로 들어간다. 투명한 외피를 입고 두 남녀는 싸운다. 비닐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로, 오해를 낳을 빈틈이 분명 있지만 타인과 소통하며 살아가자면 불가피하게 습득해야 하는, 그래서 최대한 진실에 가깝기를 지향하는 언어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두 남녀는 이 거치적거리는 비닐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결국 비닐을 찢고 나왔지만, 이미 말을 배운 그들은 이번에는 연인이 되어 또 싸운다. 아주 단순하고 집약된 말들을 주고받는 그들은 별로 소통되지 않는 듯 보인다. 언어와 비언어, 비언어에 가까운 언어들을 오가며 계속 싸운다. 그러던 퍼포먼스는 끝에서 긍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두 사람은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칭찬의 말을 하고, 천장에 매달린 원형 철사 안에 자신들이 벗었던 비닐을 모으고 모아 공중의 구름처럼 띄워놓았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들의 한 편의 꿈과 같은 장면. 여전히 김연재는 ‘계속 싸워라! 이겨라!’라고 말하는데, 모든 싸움의 구도에 처한 이들에게, 특히 현재 여성혐오가 논의의 과정 중에 있는 사회적 쟁점임을 고려하면, 그는 논쟁의 한계를 인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라는 도구를 적절히 사용하려는 노력과 이상을 품고서 젠더 이슈 논쟁을 지속하자고 말하는 듯하다.

2016년을 기점으로 혐오는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회자하여 들려왔음에도 솔직히 말하건대 필자는 젠더 이슈와 혐오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고 공부해오지는 않았다. 단지 무언가 사회의 화두가 되었을 때 한 개인으로서 나의 경험과 감각에서 시작해 맞닿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사회 안에서 한 가지 화두에 대해 다양한 결을 가진 이야깃거리들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해왔다. ‘혐오’라는 주제에서 시작한 복합전시 〈혐오동선〉은 단순한 주장(예를 들자면 ‘혐오는 나쁘다’와 같은 것)을 단일한 어조로 말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진솔하게 침잠해보고, 현상의 측면을 바라보며 현재를 성찰하고, 혐오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하고, 논쟁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찰하여 각기 형상화한 작업들이다. 언뜻 저마다 각자 다른 차원과 방향성을 가진 파편들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파편들이 혐오 담론을 훨씬 풍부하게 만든다. 요지컴퍼니의 말을 빌려 강조해보자면, 이들은 “혐오라는 감정․현상을 각각의 선으로 움직이고 자취를 남긴” 것이다. 사실 이 문장은 비문(非文)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혐오’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기에 각각의 작업으로 그것을 어떻게 움직인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뭉뚱그려진 감정․현상으로서의 혐오는 그 내부에 개인이 갖는 감정으로서의 혐오, 그 혐오가 생겨나는 데 영향을 미친 사회적 조건들, 사적-공적 영역을 중첩시키고 넘나들며 발생하는 혐오에 관한 모든 담론과 거기서 파생되는 감정과 현상, 그 모두를 포함한다. 〈혐오동선〉은 그 내부의 요소들을 건드려 움직임으로써 그 전체, ‘혐오’를 확장시켰다.

그래서 관객은 혐오 ‘동선’을 경험했나

〈혐오동선〉에서 ‘동선’은 중요한 두 번째 열쇳말이다. 제목에도 명시되어있는 이 ‘동선’은, “개인에게서 출발한 ‘혐오’라는 감정, 현상의 자취를 쫒아가는 전시-퍼포먼스 작업”이라는 소개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 전체 창작의 방법적 주제이다. 이와 동시에 복합전시 〈혐오동선〉은 ‘혐오동선 그리기’라는 관람의 장치를 더해 관객이 전시장에서도 그 자신의 혐오동선을 그려보도록 했다. 글의 앞에서는 창작자들이 그려낸 혐오동선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관객이 경험한 혐오동선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동선’이라는 주제가 관객 경험 면에서도 부합하도록 만들려는 그 장치는 과연 적절했는가. 관객은 〈혐오동선〉을 어떻게 감각하고 경험할 수 있었는가.

행화탕의 앞 공간과 뒷공간 입구에 대여섯 개의 털실 뭉치가 담긴 바구니가 있고 그 옆에는 “혐오동선 그리기: 털실 하나를 고른다. 내 마음 속 혐오의 자취를 남긴다.”라고 쓰인 종이가 있다. 〈혐오동선〉은 전시를 보며 이동하는 관객이 털실을 풀면서 그의 동선을 직접 시각화하도록 했다. 창작자들은 관객에게 꽤 적극적인 행위를 제안한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전시장을 경험한다고 해서 관객이 자신의 혐오동선을 그려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관객이 털실로 자신의 동선을 만들어나가는 행위는 ‘각 작품을 만나고 헤어지는 동선’ 또는 ‘창작자들의 혐오에 관한 사유와 만나고 헤어지는 동선’이지, ‘내 마음속 혐오의 동선’이 될 수 없다. 관객이 그려야 하고 그릴 수 있는 혐오동선은 그의 내면에 먼저 속해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관객의 혐오동선을 시각화한다면 먼저 관객 자신의 혐오감과 혐오의 경험을 그의 마음과 기억에서 소환해낸 후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혐오동선〉은 행화탕의 공간 특징을 살려 관객 자신의 혐오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시공간을 마련하려 했다. 〈나는 니가 싫어, 근데 나는 더 싫어〉의 ‘기도실’은 전시 공간에서 푹 꺼져 내려간 약 1.6m 높이의 작은 공간이다. 2, 3인이 비좁게 서 있을만한 곳에서 혼자 그 안에 있는 관객은 불행에 이르는 절차, ‘불행해지는 단계 14가지’를 읽으며 밖에서의 관계들을 떨치고 잠시 혼자만의 시간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영상 〈SKIN〉이 상영되는 곳은 12월의 바람이 그대로 들어와 매우 을씨년스러웠던 행화탕 공간의 뒷부분이다. 이 춥고 어두운 곳에서 관객은 종이에 쓰인 말들을 통해 몇 가지를 지시받는다. 관객은 그 말에 따라 스크린 앞에 놓인 포스트잇에 ‘자신이 혐오하는 것’, ‘자신을 혐오하는 것’을 쓰고, 그것을 구기고 찢어 차가운 바닥에서 얼어가도록 두고, 밖으로 나가 그것을 다시 마주해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혐오동선〉은 관객이 직접 참여하면서 그 자신의 내면을 살피도록 시도했다.

결론적으로, 전시장 안에서 관객들의 혐오동선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흥미로운 발상이지만 그 행위와 의미가 완전히 서로 부합하기에는 조금 힘들었다고 보인다. 어쩌면 털실이라는 오브제 또한 관객의 동선, 관객의 혐오동선에 관한 은유로 봐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행화탕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십분 활용해, 관객이 공간을 경험하고 감각하며 자신에게 있는 혐오와 그 경험을 되돌아보게 함으로써 관객의 참여를 도모한 것이 돋보인다. 전시의 내용을 이루는 ‘동선’이 그것을 관람하는 형태로서의 ‘동선’과 전적으로 부합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창작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모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그 자신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후기] 전시와 퍼포먼스의 공간에서보다는 전시장에서 유인물로 배포된 작가노트나 요지컴퍼니의 홍보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글을 전시 관람 후에 다시 읽어보며 그제야 연결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 많다. 확실히 관객이 자신을 성찰하는 오롯한 시공간은 전시 공간에서보다는 전시 공간을 나와 창작자들로부터 던져진 것들을 곱씹어 볼 때 가능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일까, 또는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일까. 덕분에 혐오라는 주제를 고찰해볼 수 있어 감사했지만, 다음 작업들에서는 전시와 퍼포먼스로도 충분한 질문을 얻고 갈 수 있는 작업을 기대해본다.

(사진 제공 – 요지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