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시작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감출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 백석과 자야 김영한을 다룬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하 〈나나당〉)은 자신을 ‘뜨겁게 사랑했던 시인 백석을 잊지 못해 평생 헤어지던 순간을 반복하며 사는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로 비교적 명확히 규정한다. 이 정의의 시사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자야의 사랑 이야기’란 표현이 쓰였고 이는 자야가 극의 중심이리란 기대를 하도록 만든다. 또한 ‘백석을 잊지 못해 평생 헤어지던 순간을 반복하며 사는’ 이란 설명은 어느 정도의 익숙한 비극성을 담보한다. 오지 않을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면서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들을 감내하는, 어떻게 보면 한국 문학에서 익숙히 다루어 왔던, 여성들의 한스런 정서와 닿아있는 비극성을.

실제로 〈나나당〉의 대본에서 느껴지는 백석의 성격은 흐릿한 편이다. 그의 여성 편력을 짐작할 수 있고 틀어진 사랑을 쉽사리 잊지 못하는 등의 낭만적 면모가 엿보임에도 그것으로 백석이란 역할 자체가 완전히 규정되진 않으므로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에 따라 상당히 다른 느낌의 백석들이 탄생할 여지가 있다. 즉, 〈나나당〉의 대본은 ‘실제 백석이 어떠했는가’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백석과 자야가 실존 인물이며 현재까지 그 둘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으므로 그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이 작품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다. 그렇다 해서 예고했던 대로 그 관심이 자야의 사랑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는가, 미묘하다. 그렇기도 하고 한 편으론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다. ‘자야의 사랑 이야기’는 자야가 이야기 행위의 주체가 됨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달리는 그저 그 이야기의 원소유자에 그칠 수도 있기에.

작품이 자야를 그리는 방식은 대체로 후자다. 공연의 시작에서 남자는 책을 한 권 들곤 자야에게로 온다. 자야는 그 책을 받아 소중하다는 듯 꼭 안는데, 그 책은 바로 백석의 시집. 그리고 그녀에게 백석이 찾아온다. 백석의 시집을 받는 순간과 백석이 찾아오는 순간을 병렬함으로써 〈나나당〉은 백석을 자야의 기억 속 대상으로 한정 짓지 않고 백석 시의 의인화로 백석의 의미를 확대시킨다. 이로 인해 부여된 백석의 자율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넘버는 38선으로 인해 자야가 있는 경성으로 남하할 수 없게 된 백석이 만주를 헤매다 부르는 곡인 ‘어느 사이에’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부모며 동생들도 멀리 떨어져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 . .

재 위로 뜻 없이 글자를 쓰며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연하여 새김질하다

이것들에 눌려 죽을 수밖에, 죽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던

그 어느 사이에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는

어쩐지 쓸쓸한 것만 오고 가는데

지치운 전등 불빛

때 글은 셔츠 그림자

가난한 늙은 어미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

. . . .

하늘은 모든 귀한 것들을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들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 . (후략) . .

‘어느 사이에’는 자야가 알 수 없었던 백석의 처지를 말해주는 넘버이므로 무대에는 자야가 등장하지 않는다. 더불어 작품 속 백석이 백석 시의 의인화임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대개 시를 충실히 실어 나르던 〈나나당〉의 음악은 이 지점에서 감정의 농도를 짙게 표현하면서 강한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오롯이 홀로 어두운 무대에 선 백석이 본인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노래한 시를, 애수에서 격한 슬픔까지 오고 가는 음악에 실어 토로하니 이 장면이 갖는 감정적 설득력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유사한 비애를 담은 ‘북관의 계집’ 넘버의 연출 방식은 이와 상이하다.

이 북관의 계집은 아름다워

죽지 않고 살었는데

붉은 등을 달고 부끄러운 줄 몰라

만나는 남자마다 절을 했단다

이 북관의 계집은 어리석어

죽지 않고 살었는데

평생을 기다리며 슬픔을 잊지 못해

문을 닫아걸고 새김질만 했단다

. . . .

이 북관의 계집은 튼튼하여

죽지 않고 살었는데

머리엔 기억을 지고

바람과 물과 세월을 거슬러

서럽게 올라간다

돌이켜 보니 아무것도 없다

다 사라지고

거울엔 늙은 계집만 남아

‘북관의 계집’은 고향으로 돈을 가지러 간 백석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기생일을 하게 된 자야의 처지를 노래하는 넘버임에도 불구하고 자야가 아닌 남자에 의해 노래된다. 남자는 노래하면서 기생을 상징하는 붉은 치마를 입은 채 단장 중인 자야를 관찰하기도 하고, 마치 자신이 거울에 비친 자야인 듯 단장하는 자야의 몸짓을 함께 하기도 한다. 그 몸짓이 끊기는 지점은 백석의 음성이 들리면서 ‘자야’라는 이름의 유래와 의미를 밝혀주는 부분인데, 여기서 자야는 당신을 평생 기다리라고 자야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게냐고 말하고는 홀로 춤을 추기 시작하며 남자도 그런 자야의 곁에서 노래한다. 홀리는 듯하다가도 처절하며 벗어날 곳이 없다는 듯한 자야의 춤사위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지만, 그것은 결코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언어화되는 것은 오직 자야에 대한 남자의 서술과, 자야가 이 넘버에서 유일하게 노래하는 마지막 구절 ‘거울엔 늙은 계집만 남아’ 뿐.

슬픔을 지켜보도록 하는 것은 슬픔에 대해 당사자가 직접 발화하는 연출보다 감정을 극대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틀이 자야의 회상임에도 불구, 그 회상 속에서 그들의 사랑이 ‘서술’되는 대신 ‘상연’된다는 점이 이런 부류의 연출과 함께 혼합되면서 이야기 행위 주체로서의 자야는 급격히 희미해진다. 서술은 화자의 해석을 전제하지만, 상연에서의 해석은 그것을 관찰하는 인물이나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많은 장면에서 자야를 무대의 정 가운데인 평상에 위치시킨 것은 중심인물이라는 상징이 아니라 중점적으로 관찰되어야 할 대상이란 의미였는가. ‘북관의 계집’에서 자야의 춤과 발맞추어 나오는 브릿지가 ‘나는 어느새’에서도 동일하게 쓰여 백석과 자야의 정서를 묶으면서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았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음악 배치 등, 전반적으로 자야보다는 백석의 심정과 상황을 변호하는 데에 작품이 할애되어있음에도 ‘북관의 계집’이 자야의 자기 토로가 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일까? 더욱이 ‘나는 어느새’의 정서가 왜 자신을 따라 만주로 오지 않았는가, 자야를 책망하는 듯한 백석의 대사와 그에 대한 자야의 대답으로 이어지면서 비교적 길게 그 울림을 끌고 가는 반면 ‘북관의 계집’이 불러일으킨 정서는 곧이어 들려온 백석의 결혼 소식을 해프닝스럽게 표현하는 넘버 ‘결혼’에 의해 훨씬 빨리 흩어져버린다는 점을 곱씹으면,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백석을 변호하는 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니다. 자야가 한평생 그리워한 대상이 관객의 공감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자야가 한 모든 기다림의 당위가 사라지는 셈이 아닌가. 자야에게 자신의 심정을 직접 말하도록 하는 것은 백석의 시를 토대로 둘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쓰인 작품에서 비교적 한계가 분명했던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다 해도 아쉽다. 〈나나당〉이 단순히, 혹은 확실히 자야를 ‘비련의 여주인공’ 위치에 놓았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아쉬움이기에 더더욱. 주요 장면에서 자야를 다루는 방식은 작품의 소개에서 담보했던 그 익숙하디익숙한 기다림의 비극성을 말하고 있지만 대본 한 켠에 스쳐 지나가는 자야의 서술들과 배우의 연기는 자야가 단순히 ‘오지 못할 사람을 내내 기다리고 있던 비운의 여인’이 아니라 속닥대고 있기 때문이다. 자야의 삶 중 백석은 단 3년을 스쳤고 그녀는 훨씬 긴 기간 동안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백석이 그녀의 삶을 통째로 삼켰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속삭임을 조금 더 크게 듣지 못하는 아쉬움이랄까. 물론 이 정도의 속삭임이 가장 적절한 세기였으며 이 욕심을 위해서는 작품의 주제와 구조가 바뀌어야 했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제작 단계에서 의도되지 않은 우연의 산물일 수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 지점이기에.

어떤 사람은 〈나나당〉이 ‘내내 아름다운 이야기’라 한다. 그러나 백석에 대한 그리움은 자야의 의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나나당〉의 최후반부 구성 역시 그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켜준다. 자야는 백석에게 매인 제 매듭을 풀기 위해 평생 일구었던 요정을 시주하지만 그 장면엔 하필 ‘여승’이 처량하고도 예언적으로 울려 퍼진다. 백석이 자야를 생각지 않고 쓴 시마저도 자야의 앞날을 예비하고 있었다는 듯, 백석의 시가 말하는 것이 자야 자신이라면 그 시대로의 인생을 살다 가야 한다는 듯. 부처의 힘을 빌려 잊은 줄 알았던 백석은 마지막 순간에 선연한 초록 양복을 입곤 자야에게 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려준다. 의지가 이길 수 없는 그리움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준 이름, 그녀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제 이름이 ‘나타샤’임을 확인하는 순간, 자야의 인생에 오직 사랑만 있던 것이 아니었단 느낌은 아름다움 대신 묵묵히 쌓여 처절한 슬픔을 던져주었다. 내게 그가 전부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은 그리움이라 사라지지 않는 그뿐이로다 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처절함. 과연 ‘나는 이 시만 있으면 괜찮’다는 말을 정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생에서 남은 것이 시뿐이고, 그 외엔 어떤 인생의 증명도 받을 수 없어 홀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닫힌 마음의 정원 속에서 환상에 빠져온 끝, 생의 마지막에서야 이룰 수 있었던 해원은 아닐까. 관객처럼 자야와 백석을 보고 있는 남자는 저토록 흐뭇하고 따뜻한 눈길로 저들을 보고 있는데, 몹쓸 의문이다. 객석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관객들의 훌쩍거림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 울음이야 아름다운 사랑을 목도한 반응이라 해도 무겁게 짓눌린 이 마음은 이 작품의 성공일까, 혹은 실패일까.

(사진 제공 – 인사이트 엔터테인먼트 페이스북)